통합 검색어 입력폼

귀로 듣는 공연이 있다? 여행 갈 필요 없는 짜릿한 체험극

조회수 2021. 4. 30. 20:11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함께 길을 걸어간다고 믿었던 감각이 두 개의 세계로 갈라진다.

귀를 기울이면

객석에 앉아 무대 위 배우들이 연기하는 장면을 보고 감동과 여운을 갖고 돌아가는 일들의 반복. 우리는 이 일정한 틀을 ‘공연 관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던 틀이 어긋나고 깨진다면 어떻게 될까. 배우는 온데간데 없고 소리만 들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소리 없이 펼쳐지는 무성 영화에 배우들이 소리를 입히거나, 소리를 빼앗긴 배우들이 몸짓으로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배리어프리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감각에 집중해 시각과 청각이 분리되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분리된 감각을 맞닥뜨린 관객은 어색함을 느끼다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푹 빠져든다. 여기에 네 개의 작품이 있다. 우란문화재단이 야심차게 선보인 온라인 체험극 <Double>과 오프라인 체험극 <FLIGHT>,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되는 라이브 더빙쇼 <이국정원>, 2018년 한국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등극했던 연극 <그때, 변홍례>. 이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시청각 영역을 선사한다.

잠시 눈을 감아 주시겠습니까?

<Double>과 <FLIGHT>는 감각의 ON/OFF를 내세워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작품이다. 영국의 이머시브 오디오 씨어터 극단인 다크필드(Darkfield)와 협업해 비 영어권에서 최초로 선보여진 두 작품은 ‘시각이 사라지면 다른 감각들은 움직임과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는 인간 본능에 초점을 맞춰 제작되었다. 이들은 주로 360도 입체 음향을 사용하여 이어폰을 착용한 관객이 소리의 방향에 따라 반응하는 콘텐츠를 기획한다.



지난 3월부터 약 3주간 우란문화재단 2층 리허설룸에서 진행된 <FLIGHT>는 비행기 탑승이 어려워진 팬데믹 시대에서 하늘 위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인 공연이었다. 안내를 따라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면 실제 비행기와 동일한 세트장이 자리 해 있어 여행의 향수를 느끼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획기적인 구성은 전석 매진의 결과로 이어지며, 이른바 ‘양도 전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난해 진행된 온라인 체험극 <Double>과 다른 점이 있다면, <FLIGHT>에는 워밍업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먼저 <Double>은 불을 끈 상태에서 이어폰을 끼고 진행한다.

이와 다르게 <FLIGHT>는 불이 완전히 꺼지기 전 헤드셋에서 승무원의 음성과 편안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상단에 위치한 작은 모니터에서는 안전사항을 설명하는 승무원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향한 전초 단계. 영상은 곧바로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형태로 바뀌고, 이륙과 함께 완전한 암전이 찾아온다. 이어 비행기 좌석에 앉은 관객은 자신의 귀를 덮은 헤드셋에 의존한 채 공연에 참여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시각 없이 청각에만 의존하는 것이 어색해 몸을 뒤척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헤드셋 너머 목소리에 모든 감각을 집중한다.


변사의 재등장? 배우들이 말한다!

1900년대 무성 영화 시절을 가져온 작품도 있다. 자막과 음성이 영화 속으로 오기 전 변사의 역할은 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변사는 줄거리 해설은 물론 배우들의 입 모양에 맞춰 목소리를 이리저리 변조해가며 연기를 펼치고, 해설자의 역할을 넘어 성우이자 배우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5년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제작된 이후 무성영화시대는 점차 막을 내렸다. 동시에 변사의 비중도 자연스레 줄어들며 사라진 직업 중 하나가 되었다.

2021년 봄, 사라진 무성영화가 다시 스크린에 상영되며 변사의 자리에 배우들이 선다. 바로 라이브 더빙쇼 <이국정원>. 생소한 단어인 라이브 더빙쇼는 소리가 없는 영상을 무대에 가져와 직접 라이브로 더빙하는 공연을 일컫는다. 눈으로는 스크린 속 영상을 보고, 귀로는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특징. 공연의 중심이 되는 동명 영화 <이국정원>은 1957년 제작된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이자 최초의 홍콩 합작영화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품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행방이 묘연한 필름을 찾는 과정에서 소리가 유실되었다. 이후 안타까운 사건으로 소리를 잃은 고전영화에 상상력을 더하기 시작했고, 이는 영화와 뮤지컬, 연극 세 장르의 요소를 조합한 퍼포먼스로 완성되었다. 공연은 무성 영화가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동시에 무대 위 배우들이 연기와 노래를 하고, 폴리아티스트라는 효과음 제조사가 영화에 맞춰 음향 작업을 하는 모습이 한곳에 어우러진다.

이처럼 배우들의 목소리를 이용한 또 다른 공연도 있다. 극단 하땅세의 연극 <그때, 변홍례>. 1931년 일제식민지 시절 부산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은 당시 유행했던 무성영화와 라디오드라마 기법을 이용한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무대 위에서 몸짓으로 연기하는 배우들 위로 자막들이 떨어지고, 변사 역을 맡은 배우가 신파조의 말투로 그들의 상황을 설명한다. 해당 작품 역시 관객의 시선은 배우들을 향해있지만, 귀는 변사를 맡은 배우들에게 열려있게 된다.

<이국정원><그때, 변홍례>와 같은 작품들은 행위자로서의 배우와 음성언어로서의 배우가 구별된다. 이로 인해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과 청각으로 듣고 있는 것이 다른 싱크 에러(sync error)를 겪지만, 관객들은 이를 차츰 받아들이며 서로 어긋난 감각을 각각 따라가 새로운 재미를 찾는다. 분리된 감각은 두 갈래로 갈라진 오솔길을 한 번에 걷는 것처럼 어색해 보이지만, 결국 서로 다른 두 발로 하나의 길을 걷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