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주인을 찾아서

조회수 2021. 2. 9. 16:5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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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소비패턴에 맞춰 중고거래의 고정관념이 바뀌다, MZ세대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소비.

지난 몇 년간 나는 ‘물건’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하나의 물건이 생산, 소비, 사용되는 동안 환경에 미치는 영향, 또 유통 과정과 수명, 사람들이 물건을 고르는 기준, 취향 등 물건 전반에 관해서다. 관심이 증폭될수록 나의 소비 습관도 변했다. 방금 기계에서 뽑아낸 새 물건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집 물건들의 질서(동선)를 방해하지 않는지, 혹은 쥐었을 때 내 손 모양에 꼭 맞는지, 이미 내가 가진 것들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고민했다. 대체로 무채색, 녹색 계열의 물건을 선택했다. 해외여행을 떠나면 지역의 벼룩시장을 들르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 엄마나 남자친구에게 옷을 물려받는 일도 잦아졌다. 세상 어딘가에 내게 꼭 맞는 물건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이제 이것이 나만의 일이 아님을 실감한다. 사람들이 비밀거래라도 하듯 수줍게 서로의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을 지하철역에서, 또 아파트 단지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온라인 카페나 당근마켓, 번개장터 같은 애플리케이션으로 물건을 예약하고 직거래하는 모습이다. 유독 최근에 중고거래하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해 기분 탓인가 싶었는데 기사를 찾아보니 실제 거래량이 많이 늘었다. 당근마켓의 경우 가입자가 2018년 127만 명에서 작년 331만 명으로, 번개장터는 98만 명에서 148만 명으로 늘었다. 중고나라는 1800만 명을 기록했다. 지난해 거래 금액 역시 3조5000억원에 달해 이제 몇몇 사람의 소비문화라고 말하기 어렵다. 시장이 커감에 따라 투자나 사업 진출도 활발하다. 번개장터는 560억원 규모의 신규 투자를 최근 유치했고, 네이버의 자회사이자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을 만든 스노우는 최근 한정판 스니커즈 신발을 중고거래하는 플랫폼 ‘크림’을 론칭했다. 중고거래는 밀레니얼 세대, Z세대를 중심으로 성장 중이다. 번개장터 사용자의 80%가량이 MZ세대(밀레니얼+Z세대)다. 이들이 중고거래에 눈을 뜬 이유는 무얼까. 온라인으로 개인 간의 거래가 쉬워지면서 MZ세대에게 자신의 물건을 파는 건 손쉬운 일이 되었다. 우버, 에어비앤비 등을 통해 차와 집도 공유, 거래하는 세상에 쓸모를 다한 물건을 내놓는 것쯤이야 뭐. 또 남이 쓰던 물건을 사용하는 데에도 거부감이 없다. 여기에 뉴트로, 힙트로 바람을 타고 빈티지 무드가 대세라 중고시장에서 득템하겠다는 의지도 더해졌다. 혹은 리셀(희소성을 지닌 한정판 중고 상품이 비싸게 거래되는 것)로 희귀템을 사겠다는 니즈도 있다. 이 밖에도 이유는 많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건 MZ세대의 소비 패턴 변화다. 필요한 기능과 만족만 갖춰진다면 남이 쓰던 물건이나 리퍼브 상품(판매장에 전시되었거나, 고장 또는 흠이 있어 소비자가 반품한 제품)도 거리낌 없이 구매하는 실용적 소비가 증가하고 있다.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적 움직임이다. 브랜드 가치를 중요시했던 중국 역시 중고시장의 확대가 두드러진다. 알리바바 그룹에서 출시한 애플리케이션 ‘셴위’를 중심으로 1조 위안(약 174조5500억원)가량의 시장 규모를 자랑한다. 중국인들이 체면보다 가성비를 중요시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여기에 미국, 유럽에선 지금의 행복에 집중하는 욜로족만큼이나 20대부터 극단적 절약을 토대로 재정적 독립을 일궈 40대에는 은퇴하겠다는 ‘파이어족’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고용, 경제 불안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소비를 극단적으로 축소하고 저축 금액을 늘렸다. 파이어족이 아니더라도 많은 MZ세대가 저렴한 물건을 찾아 나선다. 미국 온라인 중고 의류 판매 웹사이트 스레드업(ThredUp)의 ‘2019 리세일 리포트’에 따르면 미국의 세컨드 핸드 시장은 지난 3년간 일반 패션숍보다 21배 빠르게 성장했다. 시장 규모도 약 240억 달러(28조3000억원)에서 2023년에는 510억 달러(60조원)로 성장할 것이라 관측했다. 이런 바람을 타고 H&M은 지난해 중고, 빈티지 의류 판매 사업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요새 ‘믿는다’는 말을 자주 곱씹는다. 누군가에게 ‘믿는다’라고 확신하며 말할 수 있는 게 내게는 있던가 싶었다. 되돌아보니 나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물건을 샀다. 새 옷을 사면, 더욱이 비싼 브랜드의 것을 사면 어제보다 나아진 근사한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나를 치장했다. 설렘은 잠시고 집 안 가득 쌓인 옷가지, 물건들 사이에서 숨이 막혔다. 사놓고 입지 않은 옷이, 한 번 뿌리고 책장에 던져놓은 룸 스프레이가 몇 개인지. 새 물건을 살 때면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경제가 멈췄고 실직을 하거나 무급휴가를 받은 지인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반짝이는 새 물건이 삶에 안정감, 안락함을 줄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 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담긴 공간에 둘러싸여 있을 때 충만한 기분을 느낀다. 어떤 물건의 두 번째 주인이 된다는 건 나에게 맞는 삶을 찾아 나서는 방법 중 하나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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