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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일까 위조일까?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부틀렉 문화

조회수 2020. 4. 23.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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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품의 성행=인기' 공식은 끝났다. 모조품을 대하는 패션의 갖가지 묘책과 이를 의도적으로 즐기는 부틀렉 문화.

1 부틀렉 아티스트 알렉산드라 해켓의 브랜드 ‘스튜디오 ALCH’ 2020 S/S 컬렉션. 2 페이크 패션에서 영감 받은 구찌 2018 리조트 컬렉션. 3 상하이에 문을 연 가짜 슈프림 매장. 감쪽같은 모습에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다. 4 디젤은 지난 2018년 직접 철자를 비튼 캡슐 컬렉션을 선보였다. 5 슈프림 스페인 로고. 6 페이크 패션의 유행을 촉발시킨 SSUR의 캡.

최근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어느 채용 공고를 마주한 순간이다. 지난 3월 초, 국내 취업 포털에 ‘국내 첫 정규 매장 오픈’이라는 타이틀의 채용 공고를 올린 주인공이 바로 슈프림이기 때문이었다. 광적인 인기에 비해 새로운 매장을 여는 것에 지독할 정도로 인색한 슈프림이, 그것도 국내에 매장을 연다니. ‘내가 슈프림의 공식 발표를 놓친 건가?’ ‘아니면 슈프림의 기습적인 이벤트인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메우는 오만 가지 생각과 함께 상세 내용을 확인한 순간 맥없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우리가 열광하는 뉴욕 태생의 진짜 슈프림이 아닌 ‘합법적 짝퉁’이라 불리는 슈프림 ‘이탈리아’였던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전 세계 70여 개국에 상표권을 등록했다는 이유만으로 합법적인 브랜드임을 내세우며 로고와 디자인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훔치는 이들 아닌가. 브랜드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도 모자라 이처럼 줄줄이 매장을 열고 대기업과 협업을 계획하는 등 후안무치의 행태를 일삼자 무시로 일관하던 슈프림도 마침내 매서운 칼날을 빼든다. 2018년 말부터 슈프림 이탈리아, 슈프림 스페인 등 유사 브랜드들에 순차적으로 법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승소를, 일부는 여전히 치열하게 다툼 중이다. 사실 슈프림과 같은 사건을 논하자면 끝도 없다. 케어링 그룹과 알리바바, 루이비통과 디올의 이베이, 샤넬과 더 리얼리얼 같은 거대 기업 사이의 고소 사건이 대표적으로 거론되지만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해도 그리 놀라울 것 없다. 뭐든 인기를 끌면 모조품 논란이 뒤따르기 마련이니까. 디젤은 법적 조치를 넘어 모조품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브랜드 중 하나다.

7 신 무라야마와 협업한 1017 알릭스 9SM 2019 S/S 컬렉션. 8 PZ 오파수크사티와 핼무트 랭 협업 컬렉션. 9 럭셔리 하우스 로고를 비틀기로 이름난 임란 무스비 아트워크.

지난해 모조품과의 대대적인 전면전을 선언한 이후 중국, 이집트, 모로코 등 전 세계를 순회하며 악명 높은 모조품 제조 공장을 급습하는 중이다. 작년 한 해에만 모조품을 판매하는 인터넷 사이트와 소셜 미디어 계정을 3500여 개 이상 차단하며 모조품 유통을 원천 봉쇄했다. 더불어 지난 1월 말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해외 위조품이 미국 내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 모조품의 입지는 급속도로 좁아질 거라 예상된다. 오리지널 브랜드가 이처럼 가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데에는 재산권과 소비자들의 피해를 보호하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모조품은 각종 범죄와 긴밀히 연결된다. 모조품 이면에는 아동을 비롯해 값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자금 추적이 불가능한 탓에 범죄 조직의 핵심 수입원으로 사용되어 불법적으로 재투자되거나 또 다른 범죄로 벌어들인 돈을 세탁하는 데에 쓰인다. 지난해 3월 공개된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패션이 주도하는 모조품 시장이 전 세계 무역의 3.3%, 한화 약 620조에 이른다고 한다.

한편 한 켠에선 모조품을 하나의 문화로 소비하는 이들도 있다. 브랜드 로고, 오리지널 디자인을 제 식대로 해석하고 즐기는 ‘부틀렉’이 바로 그것이다. ‘해적판’으로 해석되는 부틀렉은 본래 원작자나 가수의 허가 없이 불법 복제되어 발매된 음반을 뜻하는데, 요즘은 패션계에서 더 널리 쓰이며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굳이 시초를 따지자면 2012년에 신드롬급 인기를 구가한 스트리트 브랜드 SSUR의 ‘꼼데 퍽 다운(COMME des FUCKDOWN)’ 쯤이 되겠다.

10 임란 무스비는 구찌, 루이비통 로고를 제 식대로 해석한 컬렉션을 선보인다. 11 로고 매니아 알렉산드라 해켓의 아트워크. 12 일상의 물건으로 신발을 만드는 것을 즐기는 니콜 맥로플. 13 부틀렉에 한계란 없다. 니콜 맥로플린은 비니로 의자도 만든다. 14 찰흙으로 럭셔리 브랜드의 신발을 만드는 다이애나 로하스의 아트워크.

페이크 패션에서 범주를 넓힌 부틀렉은 지금 가장 쿨한 문화로 통용된다. 그도 그럴 것이 로고, 희소성, 기상천외한 아이디어 등 요즘 세대가 열광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이름난 부틀렉 아티스트가 가장 인기 있는 협업 파트너로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 일상의 물건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패션 아이템을 만드는 니콜 맥플로린, 스트리트 브랜드만 골라 마스크로 재탄생시키는 데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신 무라야마, 어지간한 감각으론 문턱조차 넘을 수 없다는 도버스트릿 마켓에서 수차례 전시를 연 PZ 오파수크사티, 럭셔리 브랜드 로고를 활용한 아트워크로 부틀렉 열풍을 몰고 온 임란 무스비 등이 그 주인공이다. 재미있는 건 이들 역시 기존의 제품이나 상징 같은 것을 고스란히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가짜와 전혀 상관없다는 듯 행동하는 데에는 다음의 조건이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오리지널리티를 대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이를 즐기는 대중의 유희적 시선. 불현듯 피카소가 남긴 문장이 눈앞을 스친다. ‘훌륭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세상에 완벽하게 새로운 산물은 없다. 익숙한 것에 새로운 시각을 더하는 것. 오리지널리티의 가치를 뛰어넘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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