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이 사라진다

조회수 2021. 2. 9. 17: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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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해야 살아남는다, 온라인 리테일의 강세와 오프라인의 차별화.
Barneys new york

스무 살 무렵 처음 마주했던 맨해튼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하늘을 찌를듯 솟아오른 빌딩과 그 틈을 빼곡히 메운 사람들과 차들, 귓가를 때리는 사이렌 소리, 밤낮 없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네온사인, 다채로운 문화가 차고 넘치는 휘황한 도시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5번가와 그와 이웃한 매디슨 애비뉴의 모습은 ‘맨해튼=자본주의의 상징’이라는 공식을 뇌리에 깊게 새겼다. 예로부터 막대한 자본이 흐르는 거리답게 온갖 럭셔리 브랜드가 즐비했고, 저마다 절정에 달한 호화로운 자태를 드러내며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그 중심에 우뚝 서서 영원히 저물지 않을 거라 여겨졌던 바니스 뉴욕 백화점이 지난해 12월을 기점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지난해 8월 파산보호신청을 낸 지 4개월 만에 라이선싱 전문 기업인 어센틱브랜즈그룹에 흡수된 것이다. 무자비한 그들은 인수 직후 바니스 뉴욕의 모든 매장을 매각한다고 공표했다. 이로부터 약 1년 전 뉴욕 5번가를 무려 120여 년간 지켜온 럭셔리 백화점 헨리 벤델이 사라진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뉴요커들은 다시 한번 깊은 혼란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헨리 벤델과 더불어 바니스 뉴욕은 오랜 기간 미국 럭셔리 패션의 상징으로 군림해왔다. 1923년 작은 소매점으로 문을 연 바니스 뉴욕은 조르지오 아르마니, 피에르 가르뎅, 아제딘 알라이아, 크리스찬 루부탱, 꼼 데 가르송 등 손대는 족족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브랜드를 안착시키며 명성을 드높였고, 이런 이유로 이곳에 입점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성공과 지위를 보장 받은 듯이 여겨졌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몰락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소비 형태가 급변했지만 바니스 뉴욕은 그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온라인 쇼핑에 중독된 소비자들을 오프라인 매장으로 끌어들일 만한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1년간 1600만 달러에서 3000만 달러(한화 약 358억)로 급격히 치솟은 임대료는 불 난 집에 기름 부은 듯 그들을 회복 불능 상태로 밀어넣었다. 한때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북적이던 매장은 먼지처럼 사라졌지만, 어센틱브랜즈그룹은 주특기를 살려 바니스 뉴욕을 라이선스 방식으로 부활시킬 예정이다. 그 첫 프로젝트는 기존의 콘셉트를 살린 팝업 스토어.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한 라이벌이었던 삭스 핍스 애비뉴 백화점에 첫 둥지를 틀 예정이란다. 시장경제 앞에 자비 따윈 없다는 뒤끝 진한 쓴맛을 남긴 채 말이다.

OPENING CEREMONY

이로부터 약 한 달 뒤, 애석하게도 패션계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편집매장 오프닝 세레모니 역시 모든 매장의 폐점을 선언한 것이다. 연이은 소식에 뉴요커들은 이제 트라우마까지 생길 지경. 인하우스 브랜드를 패션위크에 진출시키고 세계 3대 편집숍으로 자리매김하며, 뉴욕을 방문하는 이들이 꼭 거쳐야 할 장소에 어김없이 이름을 올리던 오프닝 세레모니까지 백기를 들자, 오프라인 쇼핑 종말론자들이 곳곳에서 활개치기 시작한다. 이대로 우리가 알던 쇼핑의 종말이 다가오는 걸까? 시대는 격변했고 소비층 역시 급변했다. 소비의 중심축을 차지하는 MZ세대(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보다 현명해졌다. 오프라인 매장의 트렌디하고 쿨한 감각을 경험하려 들지만 정작 소비는 가격 경쟁력이 탁월한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한다. 오프라인 매장이 그저 제품을 경험하기 위한 ‘쇼룸’으로 전락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오프닝 세레모니 매장은 여전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다만 민망하리만큼 한적한 카운터는 현실의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게다가 발품 팔아 신진 브랜드를 발굴하고 독특한 제품을 소개하던 편집매장의 이점 역시 사라진 지 오래다. 클릭 몇 번이면 존재하는 모든 제품에 닿을 수 있는 세상에서 이들이 경쟁력을 잃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지난 2017년 12월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설의 편집매장 꼴레뜨의 창립자 사라 아델만 역시 소비자들이 직접 구할 수 없는 제품은 없다는 사실을 꼴레뜨 폐점 원인으로 꼽기도 했다.

1 matchesfashion | 2 essense | 3 the real real

반면, 오프라인 매장이 맥없이 무너지는 동안 ‘네타포르테’, ‘매치스패션’, ‘파페치’ 등 온라인 쇼핑 플랫폼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몸집을 불리고 있다. 이들은 수백만원짜리 의류뿐만 아니라 까르띠에, 부쉐론, 쇼파드 등 수천 만원을 뛰어넘는 주얼리와 시계도 온라인으로 팔 수 있다는 걸 증명하며 승승장구 중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온라인 플랫폼이 반대로 오프라인으로 눈을 돌린다는 사실이다. 연간 5000만 명 이상이 소리 없이 들락거리는 매치스패션은 지난 2018년 9월 런던 메이페어에 5층에 달하는 복합문화공간 ‘5 카를로스 플레이스’의 문을 열었다. 쇼핑뿐만 아니라 각종 패션 이벤트와 콘텐츠를 통해 매치스패션의 문화를 전파하며 경험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에 밀접하게 다가선다. 로스앤젤레스 명품 거리 멜로즈에 입성한 온라인 중고 럭셔리 플랫폼 ‘더 리얼리얼’, 아마존에서 별 4개 이상의 높은 평가를 받은 제품만 판매하는 뉴욕 소호의 ‘아마존 4-스타’, 쇼핑과 프라이빗 서비스, 카페 공간까지 겸비한 에센스의 ‘에센스 몬트리올’ 스토어 역시 이와 맥락을 함께한다.

1 colette | 2 nordstrom

한편 바니스 뉴욕과 인접한 또 하나의 럭셔리 리테일 백화점 노드스트롬은 지난 12월, MZ세대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온라인 기반의 뷰티 브랜드 글로시에와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노드스트롬 7개 매장에 팝업 스토어를 열고 오로지 ‘글로시에 유’ 향수만 판매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골자다. 온라인으로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향수’의 특성을 내세운 덕분에 노드스트롬은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노드스트롬처럼 오프라인 리테일은 고고한 태도를 벗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오늘날의 현명한 소비자들은 희소성, 가격 경쟁력, 직접 경험, 브랜드 콘텐츠 등 다채로운 요소를 동반했을 때 비로소 지갑을 연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리테일은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게 됐다. 덕분에 즐길거리가 더 많아졌다. 온라인부터 오프라인까지 그저 재미있는 것을 마음껏 누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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