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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JOWOO: 99%IS- 바조우의 1퍼센트

조회수 2020. 4. 6. 12: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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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이섀도우와 마스크를 걷은 인간 박종우에 대하여.

블랙 아이섀도우와 마스크 그리고 기상천외한 헤어스타일. 99%IS-의 바조우 혹은 박종우. ‘유별’이라는 수식이 그 누구보다 어울리는 그는 그 외모 만큼이나 독특한 디자인으로 하이패션의 생태계를 교란하며 자신만의 스타일 세계를 구축해왔다. 시작으로부터 9년, 힙합이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드는 지금, 그는 거꾸로 자신의 근간인 펑크를 내세우며 트래비스 스콧, 오프셋, 플레이보이 카르티 등의 힙합 아티스트를 팬으로 사로잡았다. 지금 패션 신에 바조우와 같은 인물이 또 있을까? 이 유별난 사람은 대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출발했으며, 또 누구와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한국을 거점으로,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가장 요란한 일을 벌이고 있는 바조우를 새 컬렉션 준비가 한창인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늘 뜯어져 있던 마스크는 굳게 닫혀 있었다.

“빨대로 음료수를 마시려고 마스크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바조우 하면 구멍 뚫린 마스크로 유명한데 요즘에는 잘 안 뚫는 것 같다. 시국을 의식한 건가?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의식적으로라도 막아두고 있다. 원래 무조건 구멍을 내는 건 아니다. 내 마스크 패키지 뒷면에도 뚫을 때와 안 뚫을 때의 용례가 적혀 있다.


뚫고 안 뚫고, 어떻게 다른가?

‘HIDE’와 ‘SMILE’의 두 가지 모드로 착용할 수 있다. 마스크의 찢어진 부분이 마치 웃고 있는 입처럼 보이는데 사람들이 웃음을 강요하거나, 미소가 필요할 때는 구멍을 뚫고 ‘SMILE’ 모드로 착용한다. 반대로 혼자 있고 싶거나, 표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는 뚫지 않고 ‘HIDE’ 모드로 쓴다. 하지만 마스크의 본래 이름은 ‘HIDE’다. 사실 이달에 ‘SILENCE’라는 검정색의 마스크가 새롭게 출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면서 생산이 중단됐다.


마스크 주문이 쇄도했겠다.

지금이야 적정가가 돼버렸지만, 처음에는 다들 가격 때문에 망설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에 다들 많이 사더라. 특히 외국인들이 많이 사서 인스타그램으로 ‘인증샷’을 보내주고는 한다. 지금은 마스크가 품절됐고, 수출마저 법적으로 금지됐다.


도대체 마스크는 왜 처음 쓰기 시작했나?

펑크를 좋아하고 오토바이도 즐겨 타서 어렸을 때부터 가죽으로 된 마스크를 만들어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되면서 마스크 자체가 익숙해졌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워낙 싫어하는 일본 사람이니까 그곳에서는 마스크가 일상이다. 기관기가 좋지 않아서 덩달아 매일 쓰고 다녔다. 멋이라고 하던 말던 상관 안했다. 구멍을 뚫게 된 건 답답해서다. 계속 쓰고 있자니 코도 간지럽고, 음료수도 마셔야겠고, 해서 어느날 빨대를 끼우려고 마스크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사실 마스크에 뭐 굉장히 특별한 의미랄 건 없다. 그리고 상황이 좀 나아지면 다시 만들 예정이다.

“하고 싶은 걸 하는 1%가 결국 모든 걸 차지한다는 뜻이다.”


바조우라는 이름으로 처음 사람들 앞에 등장한 건 언제였나?

중학교 때부터 밴드 형들 쫓아 옷을 꿰매주며 다녔다. 당시 한국에는 밴드 옷 파는 곳이 많이 없어서 주로 직접 만들어 입었는데 한번은 체크 팬츠가 입고 싶어서 크레파스로 온통 칠해서 입고 나간 적도 있다.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뭘 해서 먹고 살지 고민할 때, 그 형들이 디자인 공부를 해보라고 해서 패션스쿨에 입학했고, 졸업식 다음날 도쿄 컬랙션에 데뷔를 했다. 그게 대중에게 처음 등장했던 때가 아닐까.


그래서 공연장에 안 온 사람에게도 맨 처음 만들어 판 건 무엇이었나?

99%IS-를 처음 시작한 게 2011년,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어디에 취직할 생각은 애초부터 못했고, 그래서 시험 삼아 브랜드를 시작했다. 그때 만들던 게 1970년대와 80년대의 믹스된 펑크 아이템이었고, 일본의 빈티지숍 베르베르 진에서 자본 3백만 원으로 처음 가죽 재킷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돈이 없었으니, 한 개 만들어 팔고 그 돈으로 다시 다른 하나를 만들어 파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베르베르 진에서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데님 재킷, 청바지 등 그들이 제공하는 옷을 젊은 디자이너들이 새롭게 각색하는 것이었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게 꽤 큰 동기가 됐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디자이너는 또 누가 있었나?

와코마리아, 미하라 야스히로 등. 알다시피, 내가 만들던 게 결코 일반적이지는 않았는데, 일본은 락 스타일의 역사가 깊고 팬층도 두터워 그들과 이야기가 잘 통했다. 당시 ‘어, 이거 너가 만든 거야?’, ‘이거 혹시 그거 아니야?’ 디자인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퍽 즐거웠다.


말한대로, 당시 한국에서 펑크나 락은 특히 패션으로서 트렌드와 동떨어져 있었다. 일본에서 계속 옷을 만들 생각은 왜 안했나?

처음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컬렉션을 진행했다. 그때 같이 컬렉션을 도와주던 팀 대부분이 한국 학생들이었는데 비자 문제 등으로 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도 같이 한국에 돌아오게 됐다. 덕분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일본과 한국, 양국에 모두 존재하게 됐는데 지금도 펠트 같은 소재나 니트 등은 같이 일하는 일본 분들이 도맡고 있다. 같은 회사나 팀은 아니지만 함께 무언가를 일구어 나가는 사람들, 그들을 1%라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SFDF를 수상하면서 좀 터가 잡히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99%IS-의 99%는 무엇이 차지하고 있나?

99%는 사실 1%에 기인한다는 걸 역설적으로 표현한 거다. 남들이 알건 모르건 상관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1%가 결국 모든 걸 차지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99%IS-다. 외국에 다니다 보면 종종 그런 ‘1%’들을 만나는데 서로 알아 보고 반갑게 인사하기도 한다. ‘1%’는 어딜 가나 있다.

기저에는 결국 펑크라는 정신이 자리한 건가?

처음에는 난 패션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저 멋부리는 것을 좋아할 뿐이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패션이라는 게 내가 싫어하는 것이더라. ‘진정으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남들한테 잘 보이려고 옷을 사고 입는다고?’ 이렇게 좀 삐딱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결국 바뀌게 되더라. 어찌됐던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 결국 내가 생각하는 패션과 유행은 다르지 않구나 깨닫게 됐다. 뭐든 좋아하는 걸 사람들하고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결국 그게 다였다.


생각이 바뀌게 된 이유가 있을까?

예전에는 그저 나 혼자만 즐거우면 됐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하고 즐기던 펑크의 청년 문화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스타일, 그걸 따라하고 즐기는 게 결국 내가 추구하는 패션인 건데 아무리 즐거운 걸 만들어도 그걸 사람들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다면 결국 무용지물이더라. 더 많은 사람들과 즐거움을 공유해야 결국 내가 즐겁다는 걸 컬렉션을 거듭하면서 차츰 차츰 깨닫게 됐다.


즐거움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가?

즐거움 보다는 옷을 만들 때 입는 사람에 대해 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본디지 팬츠는 지퍼가 뒤에 있다. 그런데 나는 앉을 때 편하라고 지퍼를 앞에 달았다. 또 기타를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가죽 재킷의 오른팔을 짧게 만든다. 연주하는 쪽의 팔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3센치미터나 짧게 만들어 줬는데 나중에 5센치미터나 더 늘어나 있더라. 그런 생각으로 처음에는 스케이트보더, 드러머 등 주변의 사람들의 신체 치수를 일일이 다 재고 다녔다. 이런 것들이 결국 즐거움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본다.


99%IS-의 베스트셀러, ‘곱창 팬츠’도 그렇게 태어난 건가?

본디지 팬츠를 처음 보고 저런 디자인이 처음 생겨나게 됐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말했듯 어떤 디자인과 유행에는 어떤 문화나 기능에 대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한마디로 동양부터 서양까지 다리 길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태도를 보여줄수 있는 옷을 만들어 보고자 탄생한 게 ‘곱창 팬츠’다. 어떤 이들은 다리가 짧아서 곱이 완전히 접힌 채로 입는 반면, 어떤 애들은 다리가 엄청 길어서 곱을 다 풀어서 입을 수 있다.

새 컬랙션에서도 이같은 태도가 좀 반영됐나?

매 컬렉션 마다 이름을 붙이는데 새 컬렉션의 이름은 ‘태도’다. 옷이 가진 정형화된 패턴이나 세부가 사람 저마다의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수트를 맞춘다고 하면 반듯하게 서서 신체 여러곳의 치수를 재지 않나? 이게 수트 매장을 나오는 순간 몸이 다 풀어져서 원래 쟀던 치수의 패턴과 달라지게 된다. 태도라는 건 그런 부분에서 착안했다. 사실 이런 비슷한 요소는 99%IS-의 예전 디자인에도 종종 있었다.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나와 친구들은 맨날 땅바닥, 난간 같은 곳에 주저 앉아 있더라. 그래서 패턴도 주저 앉아 있을 때 더 편하게 만들었고, 로고도 정강이나 소매 등 더 잘 보이는 곳으로 배치했다. 의자에 걸었을 때 더 테가 나는 옷, 의도적으로 담배 구멍을 낸 옷 등도 어찌 보면 이런 ‘태도’의 일환이었다.


새 컬렉션에 대해 더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 이번 컬렉션에 출시되는 티셔츠는 머리가 안 들어갈 만큼 넥 홀을 작게 만들었다. 대신 직접 잘라서 입으라는 뜻으로 절취선을 그려 넣었다. 또 후디랑 티셔츠는 설명서와 함께 박스테이프를 동봉했다. 직접 붙여서 입으라는 뜻이다. 이런 게 결국 우리들의 ‘태도’이고, 나아가 우리가 옷을 대할 때의 ‘태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기억나는 협업이 있나?

첫 협업이 기억난다. 워낙에 조지 콕스를 좋아하고, 펑크에는 꼭 필요한 신발이라 첫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협업을 요청했다. 그런데 막상 제의를 하고 보니 포트폴리오로서 보여줄 게 없어서 난감했다. 그냥 다짜고짜 ‘나 조지 콕스 진짜 좋아해, 막 굽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신어.’ 라고 당시 가지고 있던 조지 콕스 70여 켤레 사진과 함께 영국 본사에 편지를 보냈더니 ‘너 진짜 웃기다. 그래 한번 해보자. 대신 너 50켤레 만들어야 하는데 가능하겠어?’라 답이 왔다. 그렇게 조지 콕스 최초의 샤크솔 에디션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건 협업이라기 보다는 YKK에 우리의 로고를 넣은 이야기인데 주로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고, 지퍼 장식을 엄청나게 넣다 보니 아무래도 확실한 지퍼가 필요했다. 또 다짜고짜 YKK를 찾아가 로고가 박힌 지퍼를 만들어 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옷에 지퍼 하나가 달려도 1천개 씩은 만들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매 컬렉션마다 찾아가서 설득했고, 결국 2년 만에 로고가 새겨진 지퍼를 만들게 됐다.

바조우는 무엇보다 뮤지션 및 여러 설레브리티와의 친분이 화제다. 거꾸로 지금 바조우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한국의 젊은 아티스트는 누구일까?

우선 오혁이 떠오른다. 종종 만나는데 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혁오 밴드로서 해야 할 것, 마찬가지로 나 역시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99%IS-로서 해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이런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게 많은 것 같다.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라는 점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던 게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혁오네 대표님이 카페 밖의 차안에서 나와 오혁이 이야기 나누는 걸 걱정한 적도 있었다. 워낙에 비주얼이 특이한 사람이니까,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지금은 너무나 친하고, 또 내가 좋아하는 대표님이다.


협업을 할 생각은 없나?

사실 2017년, 2018년의 컬렉션을 위한 노래는 모두 혁오가 만들었다. 당시 테크노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혁오가 직접 제안했고 ‘스텝에 맞춰서, 동선에 맞춰서 비트는 이렇게 짜보자.’ 함께 상의해가며 하나 하나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인기가 많다. 어떻게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나?

외국에서 내 이름이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건 레이디 가가 때문이었다. 일본 유학생 시절, 레이디 가가가 도쿄에 방문했는데 자신은 3일 동안 일본 브랜드 옷만 입을 거라 선언했다. 그중 하루를 위해 내 옷이 선택됐다. 내 후드 가죽 재킷을 입은 저스틴 비버를 우연히 만난 적도 있다. 2012년 첫 컬렉션 이후 내 옷이 일본 오프닝 세레머니에 한국인 최초로 입점하게 됐는데, 나중에 저스틴 비버가 거기서 구했다고 고백했다.

한편 퍼렐 윌리엄스는 2019년 서울에 오자마자 마자 당신의 쇼룸을 찾았다.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그래서 이건 뭐지? 하고 들여다봤더니 간밤에 퍼렐이 나를 팔로우하고 여러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더라. 한참 후 일본의 한 행사장에서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50미터 멀리서 사람들을 제치고 나에게 와서 인사를 했다. 그게 연이 되어서 인스타그램 메세지를 계속 주고 받으며 지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가 한국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 한국에 왔다며? 우리 스튜디오에 놀러 올 수 있어?‘라고 보냈더니 곧바로 ‘어디야? 지금 당장 갈게.’라는 답이 왔다. 그렇게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이 꽤 마음이 잘 맞는 친구 같아 보였다.

한 번은 퍼렐 윌리엄스가 NBA 행사때 우리의 옷을 입고 싶다고 장문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결국 보내줘 입게 됐는데 이후에 다시 ‘혹시 이 옷 나에게 선물해줄 수 있어?’라고 정중하게 연락이 왔다. 진짜 솔직하고 젠틀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열게 됐고 옷도 흔쾌히 선물하게 됐다. 그게 계기가 돼서 오프셋과도 연이 닿았다. 이후 오프셋이 직접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했고, 미국의 H.로렌조에서 ‘END N AND COLLECTION’ 스페셜 룩북을 촬영했다.


릴 야티와도 비슷한 이유로 친해졌나? 99%IS-의 스튜디오는 힙합 아티스트들의 한국 필수 방문 코스가 됐다.

그쪽 힙합 아티스트들이 서로 다 친하다 보니까 소문이 났나 보다. 릴 야티와는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일본 투어 중에 릴 야티 쪽에서 궁금하다며 연락이 왔고, 만나서 이야기 나누다 친해졌고 마침 다음 일정이 또 한국 공연이라 한국에서 다시 만났다. 스튜디오에서 우리 옷을 정말 엄청나게 많이 사갔다. 그리고 과자를 같이 먹기도 했다. 그보다 힙합과 락이 굉장히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힙합도 이제 거의 40년이 다 돼 간다. 요즘에는 힙합하는 친구들이 ‘라이엇’이라는 단어를 쓰고, 소리를 질러댄다. 에이셉 라키도 펑크의 상징인 아나키 심볼을 자신의 로고로 사용하더라. 나는 나대로 펑크에 기반한 반항적인 태도를 디자인에 담았는데 지금 힙합의 분위기가 펑크와 다른 청년 문화들과 닮아, 래퍼들이 그런 같은 태도를 좋아해줬던 것 같다.


앞으로 진행될 프로젝트가 또 있나?

트래비스 스콧이 코첼라에서 입을 곱창 팬츠를 제작하고 있다. 그에게 팔 생각은 없고, 대신 똑같은 것을 두 벌 만들어 서로가 각자 소장할 예정이다.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고 그저 서로의 추억으로. 아 그리고 나이키 재팬과의 99%IS- 9주년 특별 이벤트도 계획중이다. 아직 확실치는 않다.

지금의 99%IS-를 있게 해준 데에는 편집숍들의 공도 한 몫 했다.

분더샵과 10 꼬르소 꼬모와의 연이 깊다. 분더샵 지하에서 2018 봄, 여름 컬렉션 쇼를 진행했고, 매 컬렉션마다 도움을 주기도 했다. 10 꼬르소 꼬모는 한국에서 처음 내 물건을 바잉해준 편집숍이다. 10 꼬르소 꼬모에서 펑크에 관한 전시를 열기도 했는데, 모두 좋은 추억으로 생각하고 있다.


해외의 편집숍들과도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해외 편집숍으로는 H.로렌조가 각별하다. 여러모로 지원을 많이 해줬다. 가죽에 폭탄으로 데미지를 입히는 프로젝트, 스트립 클럽 캡슐 모두 H.로렌조의 후원 덕분에 진행이 가능했다. 그는 나에게는 어떤 것이 더 나 다운 결과물인지 물어보게 되는, 멘토 같은 사람이다. 그가 해준 ‘이런 건 너밖에 할 수 없어.’라는 말은 지금까지도 나의 독창성에 큰 힘을 불어넣는다.


바조우에게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예전에는 싫은 것 투성이에 불만만 가득한 곳이었다. 뭘 하려고 해도 안되는 것만 보였으니까. 그래서 ‘SEX, SHIT, SEOUL, SSIVAL’ 같은 문구가 새겨진 아이템을 만들고는 했다. 지금은 애증 관계 같달까? 나는 그저 여기 서울에 지금 있으니까, 즐겁고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큰 의미 같은 건 없다.


99%IS-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

어떤 정체성이 뚜렷한 브랜드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저 제일 힘들고, 제일 어렵고, 제일 즐겁고, 제일 먼 곳에 99%IS-를 갖다 놓고 세상에 없는 관념을 디자인으로서 만들어보고 싶다. 중요한 건 위, 아래가 아닌 옆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다.


올해가 99%IS-의 9주년이라고 했다. 특별한 프로젝트가 또 준비돼 있나?

친구들이 입었던 옷들로 전시를 한 번 하고 싶다. 찢어지거나 낡아도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걸어둔 채, ‘이게 우리의 삶이고 옷이야,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어.’를 보여주고 공감하고 싶다. 그러다 맘이 맞으면 즉흥 공연도 펼치는 거다.

Editor Seungho Jang, Soobin Kim

Photographer Less

Videographer Sunghyun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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