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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잠깐, 멈춰서는 장소들

차와 함께 달리는 모든 순간에는 드라이브의 기쁨이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는 곳, 혼자 한 숨 크게 내쉴 수 있는 어떤 장소야말로 당신만의 훌륭한 쉼표가 될 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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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의 기쁨은 목적지를 향해 맹렬히 달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잠깐 쉬어가는 그 순간이 더 중요할 지도 모릅니다

드라이브에는 목적지가 필요 없다는 말, 그냥 달리는 일 자체가 좋을 뿐 굳이 목적지를 정해놓고 달릴 필요가 있냐는 말, 자주 들으시죠? 틀린 말은 아니에요. 목적지 없이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자체가 바로 드라이브의 묘미니까요. 세상에는 성취가 아니라 경험 자체가 중요한 일이 있고, 드라이브야말로 경험 자체가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일 거예요. 사실 그렇잖아요? 우린 오늘 하루 종일 성취를 위해 달렸는데, 드라이브마저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애쓰면서 달리는 건 좀 숨막히지 않아요?

그렇게 여러 날을 달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한 숨 돌리는 장소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일종의 단골이랄까요? 목적지로서의 장소가 아니라, 어쩐지 그 곳에 내 몸과 마음을 의탁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장소 말이죠. 거기 뭐가 있어서가 아니에요. 때론 그곳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그런 장소는 어디에나 있고, 드라이브의 규모에 따라 서울과 경기도를 넘나들기도 합니다. 자동차의 장르와 운전의 성격에 따라 서울 시내에서 드라이브하던 시간 안에 인천 정도는 다녀올 수 있을지도 모르죠.

인천공항고속도로를 여유있게 달리면 일상에서 잠깐 탈출한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몇 년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빠른 차를 타고 있었어요. 성능도 어마어마했죠. 마음 먹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서, 내 생각을 미리 읽고 반응하는 것 같은 차였어요. 변속도 회전도 한 박자 빨랐습니다. 심장도 한 박자 빠르게 뛰기 시작했죠.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어요. 올림픽대로를 타고 달리다가 인천공항고속도로에 올라탔습니다. 늦은 밤이었어요. 11시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음 푹 놓고 달렸습니다.

그런 경험 있으시죠? 텅 빈 고속도로에선 오히려 속도 감각을 잃곤 합니다. 타코미터의 숫자에서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그래서 마구 달렸다는 뜻이 아니에요. 오히려 욕심 같은 게 다 사라지고, 과속 감지 카메라가 나타나든 말든 안 찍힐 속도의 정속으로 주행 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몸의 쾌락을 동시에 찾는 거죠. 차에 집중하면서, 아주 세세한 즐거움을 찾으면서 말예요. 그날도 그랬습니다. 대체로 고속도로와 조명, 나와 차만 있었던 도로를 그저 유유히, 강에 떠있듯이.

신나게 달리다가 잠깐 차를 세우고 캔커피 한 잔. 드라이브의 낭만입니다

그러다 갈증이 느껴졌을 때 공항 신도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곤 건너편에 보이는 편의점 앞에 적당히 세웠죠. 그 앞 벤치에서 캔음료 하나를 마시면서 5분인가 10분인가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공항 가까이에서 어디로든 떠나는 느낌을 갖는 것도 좋겠지만, 이정도 거리를 두고 한숨 고르면서 목을 축이는 일도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상하죠? 이후로는 그 편의점이 반드시 생각납니다. 친구와 함께 나선 드라이브도, 그녀와 함께 달리던 길에도 “저기 잠깐 세울까?” 말하게 됩니다.

인천공항고속도로 전망대 주차장에 서면 근사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죠

집에서 나서는 길에 텀블러에 커피라도 미리 담아온 날이면 그대로 조금 더 달립니다. 인천공항고속도로 전망대 주차장까지 갑니다. 최근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지대가 높고 한적한 곳의 미덕이 있는 곳이에요.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걸 차 안에서 지켜보면서, 가끔 내려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도 하면서 공연한 시간을 보내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잠시나마 한적한 시간을 보내려면 반드시 마실 걸 미리 준비해야 했어요. 주변엔 정말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북악스카이웨이는 한때 자동차 마니아들의 성지 같은 곳이었죠. 요즘은 과속방지턱이 많아져서 더 여유로운 드라이빙이 가능합니다

멀리 달릴 여유도 마땅치 않을 땐 누구랑 약속한 것처럼 북악스카이웨이로 달립니다. 서울에 그런 길이 있다는 건, 정말 드라이브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선물 같은 일이죠? 하늘이 맑고 날씨까지 좋은 날은 밤까지 썩 붐비는 길이기도 합니다. 좋은 와인딩 코스라고 해서 무리해서 달리지는 않아요. 앞에 먼저 달리는 차가 있을 땐 최대한 그 차의 흐름이 맞춰 달립니다. 뒤에서 재촉하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달리기도 하죠. 그러다 팔각정 주차장을 그냥 지나칩니다.

팔각정에 오르면 느린 우체통이 있습니다. 지금 이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두면 1년 뒤에 발송됩니다. 우린 너무 빨리 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서부터 내리막이 이어집니다. 굽잇길의 정도도 조금 더 심해집니다. 달리자고 온 사람한테는 조금 더 재미있는 길이 그대로 아주 다른 동네까지 이어져 있죠. 그 길 끝에도 작은 편의점 하나가 있습니다. 언젠가 북악스카이웨이를 훈련장 삼아 수백 번이고 달렸던 후배와 거기서 마셨던 음료수가 아직도 생각나네요. 그날 이후로 북악스카이웨이를 달릴 땐 몇 번인가 거기서 쉬어가기도 했습니다. 팔각정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거기서 머물렀다가 다시 올라온 길로 내려왔다면 청운동사무소 옆에도 한적한 편의점이 하나 있죠. 어쩌다보니 계속 편의점만 소개하는 것 같긴 합니다만, 한적한 드라이브는 으레 늦은 밤이나 새벽에 하게 되니까요. 왠지 ‘오늘 밤은 편의점 캔커피 한 잔이면 아주 행복해’ 하고 생각하게 되는 느낌이랄까요?

그랜드하얏트서울 근처는 고즈넉한 정취가 가득합니다

소월길에 접어드는 길목에는 서울 구도심을 좋은 각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주차장도 있습니다. 그랜드하얏트서울로 내려가는 길 아시죠? 그 길 오른쪽에 아주 작은 주차장에 잠시 머무르는 것도 즐깁니다. 청운동에서 마시다 남은 음료수를 마저 마시면서 떠오르는대로 메모를 하기도 하고 마침 그 시간에 즐겨 듣는 라디오 채널의 재방송을 듣기도 해요. 어떤 땐 협주곡 한 악장을 다 듣기도 합니다.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날씨 역시 드라이브의 거의 모든 감각을 좌우하게 마련이니까요. 그날은 제 자신에게 유난히 더 집중할 수 있었던 드라이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해질녘에 강변북로를 서쪽으로 달리는 기분은 또 어떤가요? 사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은 거의 퇴근 시간과 겹치죠. 게다가 지는 해를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달리는 일이 썩 상쾌한 일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색온도가 점점 붉은색으로 높아지다가 끝내 검정색으로 짙어지는 시간을 차 안에서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날엔, 이 정도 교통체증 같은 건 마냥 견딜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도 해요. 일상적인 퇴근길을 나만의 드라이브 코스로 치환하는 거죠. 기억하세요? ‘일상의 개인화’라는 말.

해질녘 삼각지역 근처는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도시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뒤섞입니다. 보는 이들에게 묘한 감상을 전해주죠

이태원을 지나 삼각지 고가도로를 건너 서강대 쪽으로 달리는 길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역시 해가 지는 무렵이라면 좋겠네요. 녹사평 역 인근의 나무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삼각지로 가는 좁고 막히는 도로의 무드, 효창공원에서 마포로 넘어갈 때의 그 도시적 대비도 무척 좋거든요. 6시 정각에 가로등이 반짝, 하고 동시에 켜지는 장면을 볼 수 있다면 더 좋겠죠. 그런 날은 서울이 조금 달라보이기도 합니다.

어떠세요? 하루가 거의 마무리되는 시간이죠? 그대로 조금 더 여유있는 저녁이라면 중앙선 서강대 역 앞 공영주차장으로 향하겠습니다. 유난히 넓어 보이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그 주변을 걷기도 합니다. 밤도 아니고 새벽도 아니니까, 아직 영업이 한창인 카페들이 많이 있어요. 편의점 캔커피가 좋은 날도 있고, 누가 공들여 내려주는 커피 한 잔이 유난히 당기는 날도 있잖아요? 그런 날 제가 즐겨 가는 카페도 그 주변에 한 곳 있답니다. 어딜 가도 발렛파킹을 맡길 수 있는 강남으로부터 멀고, 신촌이나 홍대의 바쁜 풍경과도 좀 다른 곳에서 하루의 마침표를 가볍게 찍고 돌아가는 거예요.

온전히 나만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시간. 자동차가 주는 선물입니다

저한테 드라이브란 이런 의미입니다. 물론 프로 저널리스트로서 차의 성능을 시험하고, 할 수 있는 한 극한까지 몰아세우고, 옆자리에 사람을 태우기 힘들만큼 달리고 또 달릴 때도 있어요. 하지만 나를 위한 시간, 해소를 위한 드라이브라면 이렇게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한 곳을 발견하고, 발견한 곳을 내내 아끼면서 즐기는 방식으로 말예요.

당신의 드라이브는 어떤 경험인가요? 충분히 즐기고 계신가요? 문득 묻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글. 정우성 

자동차, 고전음악과 인터뷰를 어쩔 수 없이 사랑하며 한국과 당신, 우리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쓴다. <레이디 경향>, <지큐>, <에스콰이어>를 거쳐 프리랜스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HMG 저널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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