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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고성능 모델을 기다려온 이유

꿈과 열정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감동을 줍니다. 이익보다 이상을 추구하는 고성능 차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매력적인 국산차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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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능 자동차를 타본 적 있나요?

‘나는 좀 타본 사람이야’ 라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고성능 차를 얼마나 아는 걸까 싶은 호기심에 꺼낸 물음입니다. 경험은 차치하고, 그럼 고성능 차란 어떤 자동차일까요? 대체 출력이,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최고속도가 얼마큼이어야 고성능 자동차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고성능 차는 숫자가 아니라 심장이 두근거리는 경험을 안겨주는 자동차라고요. 아, 한 단어가 빠졌네요. ‘굉장한’이라는. 그러니까 고성능 차는 ‘굉장한’ 힘과 ‘굉장한’ 속도와 ‘굉장한’ 움직임으로 ‘굉장히’ 흥분되는 경험을 안겨주는 자동차입니다.

우리 서로에게 다시 물어볼까요? 당신은, 나는, 우리는, 정말 그런 고성능 자동차를 몰아본 적 있나요?

대한민국의 GDP 성장 그래프는 유례 없을 정도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립니다. 이 급격한 성장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한국 사회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표현이 있습니다. 초고속 경제성장 또는 압축성장입니다. 긴 설명이 필요하진 않을 듯합니다. 마치 엘리베이터를 탄 것처럼 가파르게 치솟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경제성장 그래프를 다들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는 경제뿐 아니라 산업, 사회, 문화 등 분야의 구분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성장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빠르게 달려오다 보니 놓치거나 외면한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동차 사회를 예로 들면 보행자에 대한 배려, 추월 차로에 관한 인식이 대표적입니다. 전통적인 기능성 자동차를 건너뛰고 세단에서 SUV로 직행한 시장의 흐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기업 살림에 당장 보탬이 되는 합리적인 모델과 기업의 큰 그림 없이는 투자하기 어려운 감성적 모델 사이, 현격한 대접의 격차도 마찬가지죠. 한국 자동차 사회에서 해치백이나 왜건이 푸대접을 받고, 또 로드스터나 컨버터블 같은 국산 오픈카를 아예 만날 수 없는 배경이겠지요.

1990년 발표된 현대 스쿠프는 ‘고성능’을 표방한 최초의 국산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성능 자동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한국 자동차 역사에는 그간 ‘고성능’을 표방한 모델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는 제품 속성을 부각하는 도구로 소모되기 일쑤였습니다. ‘고성능 DOHC 엔진’, ‘고성능 타이어’, ‘고성능 사운드 시스템’, 심지어 ‘고성능 에어백’까지. 고성능 이미지가 강한 스포츠 모델도 간간히 등장했지만 엔진이 만족스러우면 변속기가 아쉽고, 허전한 섀시가 충분한 파워트레인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등 번번이 한두 가지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빈약한 콘셉트 때문에 탄탄한 하드웨어가 빛을 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세대를 거듭하며 꾸준히 이어진 사례가 없었습니다. 미국의 포드 머스탱이나 쉐보레 카마로, 유럽의 폭스바겐 골프 GTI나 포드 포커스 RS, 일본의 시빅 타입 R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부모 세대의 피땀으로 초고속 성장한 한국 사회에서 고성능 차는 ‘사치’의 한 범주로 분류돼 왔습니다. 여기에 철부지 또는 ‘양아치’라는 이미지까지 덧씌워졌지요. 자동차를 유희의 도구로 삼는 일은, 우리에게 일종의 터부였습니다. 세대별로 기억하는 고성능(이미지) 차는 있어도 대대손손 기억하고 공감하는 고성능 차가 한국 사회에 없는 이유를 여기서 찾는 건 결코 무리가 아닐 겁니다.

스웨덴의 하이퍼카 브랜드 쾨닉세그의 아제라 RS입니다. 쾨닉세그는 고성능 슈퍼카를 만드는 업체지만 모터스포츠와는 큰 인연이 없죠

고성능 차 시장과 문화가 열악해진 것에 한국 자동차 제조사의 책임은 없었을까요? 그럴 리가요. 제조사가 제품을 내놓지 않는데 그 시장이, 그 문화가 저절로 만들어질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고성능 자동차는, 초고속 경제성장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해도 한국 자동차 제조사가 스스로 챙기고 도전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고성능 차 개발의 시작은 모터스포츠 활동에서 비롯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실상 고성능 차를 판매하는 회사 중 자동차 경주와 거리가 먼 곳은 이탈리아 람보르기니나 쾨닉세그, 파가니 존다처럼 21세기에 태어난 신생 슈퍼카 브랜드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들도 GT 레이스 출전 팀에 개조한 경주용 차를 공급하거나 오너십 프로그램에 가까운 원메이크 레이스를 운영하는 등 나름의 레이스 활동이 있지만, 직접 꾸린 팀으로 세계 대회에서 경쟁하는 일은 없습니다. 페라리나 포르쉐, 메르세데스 벤츠, 르노와 푸조-시트로엥 등 오래 전부터 자동차 경주를 직접 챙겨온 기업들과는 모터스포츠 활동을 대하는 인식이나 태도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현대차는 고성능 차 개발을 위해 연구원들을 뉘르부르크링 24시 레이스에 참가시키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우승을 위해 개발된 경주차 기술이 양산차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잘 모르겠다고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핵심은 엔지니어입니다. 경주차 개발에 참여한 엔지니어들은 양산차를 개발할 때와는 다른 세상에 눈뜨게 됩니다. 최고의 성능을 내기 위해 차의 모든 부분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경험 말이지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얘기처럼 경주차를 개발해본 엔지니어들은 자연스럽게 이전보다 높은 수준의 엔지니어링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시간과 비용, 수급 가능한 부품과 수익구조 등 양산체제의 제약 안에서 경주차의 하이테크를 구현할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되지요. 성취하고, 좌절하고, 포기했다가 다시 해결방법을 찾아내고. 이런 과정을 거쳐 양산 자동차의 수준은 한 계단 더 올라서게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성능 차의 기술은 여러 양산 자동차로 전이되고 평범한 승용차의 수준 향상을 거듭 견인합니다. 모터스포츠 활동이 빚어내는 자동차 제조업의 순기능이지요.


국내에도 마침내 그런 차가 등장했습니다. WRC 출전과 TCR 경주차 개발과 같은 모터스포츠 활동에 잇따라 최근 출시한 현대 벨로스터 N이지요. 세간에서는 이 차가 얼마나 화끈한지, 모 드라이버가 어떻게 인제스피디움 랩 레코드를 세웠는지 등에 쏠린 분위기지만 저는 이 차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벨로스터 N이라는 차가 바꾼 현실, 그리고 또 바꾸어가게 될 미래에 대해서지요. 아, 앞서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생각부터 정리해봐야겠네요. 과연 벨로스터 N은 고성능 자동차일까요? 명백하게, 네, 그렇습니다.

벨로스터 N의 2.0 터보 엔진입니다

2.0L 터보 엔진이 대표적이에요. 이 엔진은 출력의 크기보다 그걸 풀어내는 방식이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힘은 그야말로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반면 가속을 멈추었다가 재차 가속할 때는 과급 엔진에 예상되는 반응 지연 현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마치 자연흡기 엔진처럼요.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터보차저의 배기 압력을 유지하는 기능이란 걸 우리 운전자는 알지 못합니다. N 코너 카빙 디퍼렌셜이란 이름이 붙은 전자식 LSD도 엔진 못지않게 많은 일을 조용히 해치웁니다. 가속 페달을 밟는 정도에 따라 코너를 파고드는 기세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운전자의 실수로 주행궤적을 벗어나는 위급사태를 수습하기도 하지요. 화끈한 가속과 짜릿한 움직임 못지않게 박력 넘치는 소리, 가속 페달에서 급하게 발을 뺐을 때 곧바로 제동에 들어갈 채비를 하는 브레이크 시스템은 또 어떻고요.

현대차 고성능 개발팀은 엔지니어 토크쇼 등 여러 행사를 통해 고객들을 직접 만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성취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

가만 보면 벨로스터 N의 모든 기능은 차의 재능을 오롯하게 끄집어내도록 굳게 맹세라도 한 느낌입니다. 그건 곧 차에 대한 믿음, 그리고 차와 함께 마음껏 힘차게 달리는 즐거움으로 이어지지요. 바로 고성능 차에서 누릴 수 있는 ‘굉장한 경험’입니다. 이전 어떤 현대자동차 모델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고요. 벨로스터 N에 관해서라면 “우리 N이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회사 경영진의 그린 라이트라도 주어진 것일까요? 그린 라이트까지는 몰라도 개발 환경이 고성능 모델에 상당히 우호적으로 바뀐 건 사실인 듯합니다. “고성능 N 모델을 개발하면서 차량 개발과 실험의 기준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회사도 고성능 차 개발부서에 힘을 많이 실어주었고요”라고 말하는 벨로스터 N 개발 연구원의 설명을 들어보면 말이지요.

벨로스터 N에 자꾸 눈길이 가는 까닭은 이것뿐만 아닙니다. 현대차 고성능 개발부서는 고성능 모델을 향한 열망 하나만 품고 지원한 이들로 가득합니다. RM 시리즈와 같은 실험적 모델에 담긴 그들의 꿈이 없었다면 벨로스터 N과 i30 N 같은 ‘현실 고성능 모델’ 양산도 이뤄지기 어려웠을 겁니다. 

꿈이 뭔지, 열정이 뭔지 알고 큰 세대는 주위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독일에는 ‘골프 제너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서독에서 성장한 1980년대 전후 세대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시기적으로는 한국의 X세대와 일치합니다. 네, 골프 제너레이션은 X세대의 독일식 표현인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특정 자동차 이름이 그 세대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쓰인다는 점입니다. 골프는 짐작처럼 1974년에 처음 소개된 폭스바겐의 패밀리 해치백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봐도 특정한 자동차 모델이 한 세대를 상징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꿈과 열정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감동하게 합니다. 꿈과 열정이 담긴 자동차 역시 계산이 앞선 자동차보다 사람들을 매료할 가능성은 더 클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런 국산 고성능 모델의 등장을 기다려왔습니다. 숫자가 아니라 계량할 수 없는 감각으로 운전자를 설득하는, 그런 열정적인 자동차를 말이지요. 감동은 전염성이 매우 강합니다. 운전자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주의 사람들의 생활상에까지 긍정의 에너지를 뿌릴 수 있는 것이지요.

벨로스터 N은 다양성과 즐거움을 음미할 줄 아는 세대의 작은 출발점이 될 지도 모릅니다

벨로스터 N이라는 고성능 모델이 당대의 공기마저 바꾸어놓을 거란 호언장담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감추지는 못하겠습니다. 한국 사회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오느라 챙기지 못한 다양성과 즐거움의 가치를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거기까지 미치진 못하더라도 한국 고성능 차 문화의 진정한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많은 한국의 운전자들이 벨로스터 N을 통해 차와 교감하며 달리는 즐거움에 눈뜬다면, 그 경험을 세대 구분 없이 공감하고 공유한다면, 그래서 고성능 모델과 관계된 모든 경험과 활동이 건강한 자동차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다면, 누가 알겠어요. 먼 훗날 우리도 N 제너레이션이나 N 키즈라는 세대를 갖게 될지. 그 세대에 이런 설명이 잇따르면 더 완벽하겠군요. ‘밝고 건강한 사고방식이 특징이고 운전하는 즐거움을 아는, 벨로스터 N과 동시대를 산 2020년대 전후 세대.’

글. 김형준

올해로 만 17년째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톱기어> 한국판, 남성지 <지큐>에서 일했다. 지난해 방영된 SBS <드라이브 클럽>의 고정 패널로 출연하며 자동차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냉철한 시각을 보여준 바 있다. 최근까지 글로벌 자동차 전문지 <모터트렌드>의 편집장으로 자동차 문화에 대한 심도 깊은 자동차 문화를 알려왔다.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HMG 저널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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