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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

프리랜서 23년, 홀로 살아남는다는 것에 대하여

작가이자 번역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프리랜서 신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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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때려치우고 프리랜서나 할까?'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해보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막상 회사를 떠나 프리랜서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요. 오늘의 주인공은 그 쉽지 않은 길을 23년째 걷고 있는 신예희 님입니다. 인터넷 문화가 싹트던 시절 생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무려 23년간 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로 다양한 커리어를 이어오고 계시는데요.


삼성부터 LG까지, 조선일보부터 한겨레까지, 최고의 클라이언트와 협업하며 터득한 일이 되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랜 시간 프리랜서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 노하우는 무엇일까요? 적금처럼 차근차근 쌓아온 신예희 님의 유쾌한 성공비법을 EO가 들어봤습니다.

프리랜스 작가 겸 번역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신예희 인터뷰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프리랜서계의 '고인물', 신예희입니다. 23년을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고인물이 맞겠죠?


경력의 시작은 만화였고 글 쓰는 일도 꾸준히 해왔습니다. 번역서 3권을 포함해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고 가장 최근작이 10쇄를 찍었어요. EBS에서 팟캐스트를 진행하기도 했고 내레이션 경력도 있습니다.


협업하지 않은 회사를 찾는 게 더 쉬울 정도로 23년 동안 정말 많은 기업과 함께 일했는데요. 대표적인 곳으로 삼성과 LG, 아모레퍼시픽이 있고, 언론사로는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보그, 엘르 등이 있습니다. 아시아나항공과 대한항공, OB맥주와도 함께 일했네요.

Q. 만화가로 커리어를 시작하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IMF가 터지고 취업이 정말 어려웠던 시기에 비겁한 유학을 준비했어요. 대단한 공부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사회로 나가기 전에 몇 년 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집안 사정도 고려하지 않은 채 땡깡을 부린 거죠.


비행기 타기 일주일 전에 정신을 차렸어요. 계획을 전부 뒤집어엎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94학번인데, 졸업할 무렵에 프리챌이라는 인터넷 서비스가 유행이었어요. 싸이월드 미니홈피처럼 무료로 공간을 제공하는 서비스였는데, 거기에 매일 한 장씩 만화를 올리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됐어요. 지금으로 치면 생활 웹툰이죠.


요즘은 생활 웹툰이 흔하지만, 그때는 인터넷이라는 개념 자체도 익숙하지 않던 시기였으니까 굉장히 새로운 시도였어요. 남들보다 빠르게 발견한 기회였죠.


그만큼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주변의 반대도 컸어요. 개인 일기를 왜 인터넷에 쓰냐면서 그걸 누가 보냐고 말리는 의견이 다수였죠. 그런 불안한 일 말고 그냥 일반 회사에 들어가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수천 개의 만화가 있을 땐 서로 경쟁해야 하지만, 만화가 딱 하나라면 그 만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거든요. 웹툰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이었지만, 처음 시작했기 때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야후코리아에서 3년 정도 연재하고 나니까 언론사 웹진에서 장기 연재를 요청하는 등 굵직한 일들이 하나둘 생겼어요. 만화가 새로운 사업수단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업체들도 일을 의뢰하기 시작했고요.


그렇게 경력을 쌓아서 페이를 조금씩 올렸고 프리랜서로의 인지도도 서서히 올라갔습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와 함께 흘러온 것 같아요.

Q. 만화를 매개로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시는데 프리랜서의 작업 방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완벽하게 틀을 갖춰 놓고 프리랜서를 고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업체에서 프리랜서를 쓰는 이유가 내부에서는 해결이 안 되기 때문이잖아요. '돈 줄 테니까 얼른 와서 이것 좀 해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거죠.


미팅을 하면 보통은 '우리는 모르겠으니까 그쪽에서 어떻게 좀 해주세요' 하는 식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우아한 문장으로, 나름대로 고민했다면서 만든 허접한 PPT와 함께 프리랜서에게 전달하는 거고요. 그런데 이런 상황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삼성그룹 전 사원의 교육용 콘텐츠를 만든 적이 있는데, 경제경영 철학을 다뤄야 해서 정말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담당자분도 들어갈 내용이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쉽게 풀어내려면 역시 만화가 짱인 것 같아요. 잘 부탁해요, 작가님!"이라는 말과 함께 엄청 두꺼운 경영서적 10권을 주고 떠나셨죠.


이런 상황에서 '큰일 났다! X 됐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는 거예요. '이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면 앞으로도 계속 협력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며 일하는 거죠.

프리랜스 작가 겸 번역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신예희

당시에 저도 "헉!" 한 마디만 외치고 미친 듯이 일했어요. 그때 머리숱이 정말 많이 줄었습니다. 비유를 통해 어려운 내용을 풀어내려고 고민도 많이 하고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이솝우화>가 세기를 뛰어넘어 흥하는 이유는 우화의 비유가 적절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교육용 콘텐츠도 마찬가지죠.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보다 적절한 비유를 통해 전달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거든요.


칠판 같은 거 하나 그려놓고 공식만 달랑 써놓으면 일은 쉽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어요. 하지만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과정은 힘들지만, 더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결과가 나오죠.


예를 들어 '사원 A 씨가 올리브영에 갔어요. 립스틱을 2개 사도 되는데 색깔이 비슷해서 하나만 샀어요'라는 식으로 어려운 주제를 자연스럽게, 재미난 이야깃거리와 구체적인 비유로 풀어냈죠.


스스로 입증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정말 죽자고 만화를 만들었어요. 다행히 결과는 성공적이었어요. 당시 어지간한 대기업에서는 다 연락을 받았으니까요.

프리랜스 작가 겸 번역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신예희 인터뷰

Q. 을의 대명사로 불리는 프리랜서로서 여러 기업을 상대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요.


많은 분이 여러 기업과 일하면서 어떻게 20년 넘게 프리랜서로 버텨왔는지 궁금해하시는데요. 사실 어떤 업체라도 첫 일은 흔쾌히 주세요. 마감일 지켜서 마무리하면 비용 받고 잘 끝낼 수 있고요.


하지만 첫 번째 협업이 잘 끝냈다고 해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진짜 관계는 두 번째 협력에서 시작된다고 봐요. 다시 일을 맡긴다는 건 일을 제대로 했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 관계를 이어가려면 저도 많은 걸 해주고 노력해야 하고요. 


가끔 주변에서 "조직 생활도 안 맞고, 사람 만나는 거 너무 힘들어. 나도 프리랜서 하고 싶다"라는 말을 듣는데 그때마다 꼭 다시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해줘요.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해야 하는 노력도 많고, 포기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도 굉장히 많거든요. 시간 약속은 칼 같이 지켜야 하고, 언제 연락이 와도 텐션 좋게 '네. 준비됐어요!'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해요. 지난번에 정말 즐거웠고 해피했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줘야 하는 거죠.


정말 재밌다고 느낄만한 일을 만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들어오는 일을 재밌어하는 게 더 효율적이죠. 그래서 저는 의식적으로 텐션을 올리려고 노력해요. 유치하지만 말이라도 하는 거예요. 혼자서 허공에 대고 "너무 좋다!"라고 외치면서 일하는 거죠.


의식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이글이글 열정에 불타는 눈으로 재밌다고 연신 말하면서 일을 하면 정말 일을 즐기고 좋아하게 돼요.


인터뷰를 하는 지금도 굉장히 잘 웃고, 텐션이 좋지 않습니까? 저는 혼자 일하는 사람이잖아요. 말 한마디 안 하고 하루를 보내는 날도 많아요. 오늘 같은 인터뷰 자리에서 제가 평소처럼 말없이 축 처져 있으면 일이 안 돌아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일이 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오늘도 최고로 잘 협조하기 위해 점심도 든든하게 먹고, 커피를 한 잔 딱! 마시면서 '나는 노래 강사다. 오늘 분위기는 내가!'라고 생각하면서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왔습니다.

프리랜스 작가 겸 번역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신예희

Q. 일을 즐기려는 마인드컨트롤이 정말 중요한 것 같은데요. 프리랜서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또 있을까요?


조직에 대해서는 지금도 배우는 중이지만, 모든 조직의 공통점은 일이 되게 한다는 점이에요. 이건 프리랜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프리랜서든 아니든 일이 되게 하려면 측은지심이 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쟤도 힘들겠지' 하는 마음을 가져야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까요?


사실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도 회사에서 제일 높은 직급은 아니에요. 중간 관리자에게 주어진 권한의 폭이 그렇게 넓지도 않고, 이분들도 잘못하면 상사한테 뒤지게 깨집니다. 그러니 마감 시간과 정해진 예산 안에서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하게 잘 마무리하고 싶어 하시죠.


그러니 일이 되게 하려면 '쟤도 입장이 있겠지. 괜히 나 때문에 깨져서 퇴근길에 소주 마시면 슬프겠지. 그래, 좀 둥글게 하자' 같은 식의 측은지심을 가져야 해요. 옛날식, 꼰대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듣기 시작하면 한없이 부정적으로 들리거든요.


사실 처음부터 잘해야 하는 건 너무 기본이에요. 늘 다른 스타일의 선택지를 두 개 이상 준비하고 제안해서 웬만하면 할 말이 없게 만들어야 해요. 그러면 드라마처럼 서로가 옳다고 다투는 일이 생각처럼 많지 않아요. 조직에서 크게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하게 일하는 것도 굉장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제가 이렇게 일 잘하는 법에 관해 이야기하면 '너는 원래부터 잘했냐!'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결과물만 보이지, 제가 평소에 얼마나 노력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는 보이지 않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요.

프리랜스 작가 겸 번역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신예희

Q. 평소에 꾸준히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희 님의 경쟁력은 꾸준함에서 나오는 걸까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매일 원고지 한 장씩 글을 쓰는 사람은 1년 동안 수백 장의 원고를 쓰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원고지 한 장씩 묵묵하게 모으며 자기 경쟁력을 쌓아가는 거죠.


소액적금처럼 조금씩 자기 경쟁력을 높이는 거예요. 제가 적금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하루에 1,000원씩 1년간 모으면 36만 5,000원이 되잖아요. 그런 적금이 열 개가 넘어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매일 도달 지점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즐기는 편이거든요. 나만의 경쟁력을 쌓는 것도 그렇고, 소비에서도 마찬가지죠.


4년 반마다 노트북을 바꾸는데, 하루에 얼마씩 모아야 4년 반에 노트북을 살 수 있을지 계산부터 해요. 갖고 싶은 걸 바로 카드를 긁는 짜릿함도 있지만, 원하는 걸 구매하기 위해서 조금씩, 꾸준히 다가가는 과정도 즐거워요.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을 통해 그 물건이 진짜 필요한지 고민하고 소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거든요. 최근에는 뒤로 쫙 눕혀지는 전동 리클라이너를 과감하게 구입했어요. 코로나19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집 공간을 쾌적하게 만드는 데 돈을 쓰고 있거든요.


자신을 잘 알수록 최적화된 소비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적합한 소비 방식은 물론, 무엇을 샀을 때 일의 능률이 오르고 생활에 활력이 생기는지도 알 수 있으니까요.

프리랜스 작가 겸 번역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신예희 인터뷰

Q.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프리랜서로 일해오셨는데요. 일과 삶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저는 예술가가 아니에요. 인류사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기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제가 원하는 건 일이 되게 하는 거예요. 일이 잘 굴러가서 '이번 일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무난하게 끝나면 가장 좋겠어요.


언제든지 클라이언트에 맞출 준비가 돼 있고 저를 버릴 준비가 돼 있습니다. 물론 돈을 많이 주시면 제일 좋겠죠?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이 바닥에서 일하고 싶어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여자로서 일하기 좋은 환경을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했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잖아요.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사람도 많아요.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비슷한 일을 하시던 분들이 여럿 계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명씩 사라지는 걸 보면서 참 슬펐어요. 그래서 더 오래 일하고 싶은 것 같아요. 계속 저의 자리를 지키면서 30년 차, 40년 차까지 일하고 싶어요.


여러 이유로 경력이 단절됐다가 10년 후에 다시 돌아온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돌아온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이 사람 아직도 일해?'라는 생각이 들면 좋겠어요.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 있다는 건 그 바닥이 꽤 괜찮다는 뜻이잖아요. 저를 보면서 '우리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 본 아티클은 2020년 11월 공개된 <삼성-LG를 혼자 상대하는 22년차의 생존 노하우>의 내용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 23년째 삼성부터 LG까지, 조선일보부터 한겨레까지, 수많은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해온 프리랜서 신예희 님의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만나보세요.


글·편집 이영림






EO(Entrepreneurship & Opportu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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