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봤을 '이 직업'

조회수 2020. 11. 4. 14:5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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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번역가로 산다는 것, 영화번역가 황석희

영화를 많이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눈여겨보는 부분 있을 겁니다. 바로 '영화를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가' 인데요. 다른 나라에서 만든 영화를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번역가는 영화계에서 꽤 중요한 직업일 것 같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원작의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도와주지만,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직업은 아닌 영화번역가. 오늘 EO가 만나볼 분은 <데드풀>, <어벤저스>, <보헤미안 랩소디>, <스파이더맨>, <나이브스 아웃> 등 수백편의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뮤직비디오 번역작업을 해온 영화번역가 황석희님입니다.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영화번역가 황석희입니다. 해외 영화의 한국어 자막을 쓰는 일을 하고 있어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 '데드풀', '스파이더맨'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다니엘 크레이그와 크리스 에반스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유명했던 '나이브스 아웃'을 번역했습니다. 관객과 가장 친한 번역가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Q. 영화번역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영어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죄송한 말이지만 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혀 없어요. 심지어 저는 외국 유학 경험이 없어서 영어 실력이 대단히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문 영화 번역가가 될 수 있었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영어로 번역하신 달시 파켓Darcy Paquet 씨가 계세요. 그분이 한국어 번역을 굉장히 재미있게 하시지만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는 않습니다. 그것과 같아요. 제 영어 실력이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은 제가 그 누구보다 자신 있었습니다. 


사범대학교는 보통 2-3학년부터 임용고시를 준비해요. 제가 대학 당시 학업에 충실하지 않아서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받고 임용고시는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영어 밖에 없어서 이걸로 생계 유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여러가지 번역 일 중에서 영상 번역 일을 맡았는데, 비디오 테이프를 몇 초 단위로 끊어 들으면서 자막을 달았어요. 1분을 번역하는데 2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시 제가 90시간 짜리 영상을 다 번역하면 10만 원 정도 받았어요. 이후에는 작업의 속도가 붙고 고객도 늘어나서,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자막 번역을 300편 정도 하고 히스토리 채널 다큐와 드라마 번역 일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Q. 영화번역가가 되기까지 우여곡절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은데요.


프리랜서로 일하는 분들은 대게 비슷한 경험을 하는데, 불안한 클라이언트를 만나서 작업하고 돈 떼이고 사기 당합니다. 사기를 안 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냐면 업계에서 어느 정도 알아주는 번역가가 돼야 해요. 그런데 이름 있는 작품을 맡기 전까지 굉장히 힘듭니다. 초기에 저는 한국에 있는 모든 영화 수입사와 배급사에 연락을 돌렸어요. 국내에 있는 영화 수입사 중에서 제 이메일을 안 받아본 회사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연락해도 회신을 받는 일은 드물어요. 


'케이블TV 자막은 이렇게 써라, 극장 자막은 이렇게 써라' 알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상 자막 번역가는 어디서 일을 배워야 하냐면 극장에 가서 어깨너머로 배워야 해요. 번역가마다 자신의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어떤 분의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지 직접 보고 깨달아야 했어요. 첫 영화 번역을 맡기 전까지 저는 케이블TV 자막 번역을 오래 했습니다. 그때 자막 자체만은 영화관 버금 가는 퀄리티로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몇 천 편의 드라마를 작업하면서 한 편 한 편을 앞선 마음가짐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영화사의 직원분이 우연한 기회로 제가 번역한 '뉴스룸'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됐어요. 자막이 너무 재밌었다며 그분이 저를 영화 '웜바디스Warm Bodies'의 번역가로 회사에 추천해주셨고, 그게 저의 첫 영화 번역이었어요. 만약 회사의 대표님이 '황석희? 무슨 영화 했던 사람인데?'라는 질문 하나만 했어도 저는 그 영화를 맡지 못했을 거예요. 웜바디스 영화를 작업한 이후에 여러 영화사의 러브콜을 받으며 전업 영화 번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Q. 아무래도 '데드풀'을 번역하신 걸로 크게 유명세를 얻으셨는데요. 번역 과정에서 재밌는 일이 없었을까요?


'데드풀'을 처음 의뢰 받았을 때, 이런 대형 영화를 기존 번역가가 아닌 제게 맡긴 데는 특별히 원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작업에만 있는 강점을 녹여내야 했죠. '데드풀'은 굉장히 특이한 영화였는데 주인공이 제 4의 벽을 뚫고 나와서 관객이랑 떠드는 묘한 영화였습니다. 영상 자체가 기존의 관습을 뚫고 나온 모습을 보고 저도 기존과 다른 자막 작업을 진행했어요. 그런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번역가한테 상 하나 줘야 한다' '여태껏 보지 못한 자막이다, 너무 재밌다' 와 같은 반응이 줄을 이었어요. 


전 세계에서 영화 자막에 대해 가장 엄격하고 민감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관객들이 영화 자막이 마음에 안들어도 누가 번역했는지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국내 관객들이 크레딧에 뜨는 제작자의 이름을 하나 하나 살펴 봅니다. 정말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와 이 영화 번역가 누구야? 미장센 연출이 좋은데 연출가 찾아 봐야겠다, 음악감독은 누구지?' 하는 거죠. 저는 이 문화가 건전하다고 생각해요.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진 만큼 번역가도 그에 맞게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제가 찾은 방법 중 하나는 관객들과 가까워지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제 자막에 오타가 나왔어요. '아 번역가 새끼가 중학교도 안 나왔나' 하는 댓글이 바로 달립니다. 그런데 제가 평소에 관객들과 얘기도 많이 하고 가깝게 지내면 '번역가님 어디어디 오타 나왔어요ㅋㅋㅋㅋㅋㅋ' 라고 지적해주세요. 저는 그런 댓글에서 제 실수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저는 이 과정이 굉장히 건설적인 것 같아요.

Q. 영화번역가라는 직업의 고충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매년 국내에서 개봉하는 영화는 굉장히 많습니다. 몇 백 편의 영화가 개봉하는데 그중에서 백여 개 상영관을 가지고 개봉하는 대작을 작업하는 번역가는 한국에 다섯 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저처럼 전업으로 영화 번역 일을 하는 사람은 한 달에 최소 두 편 이상은 번역해야 해요. 만약, 내가 영화 번역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야 한다는 뜻이죠.  


제가 영화 번역가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저를 화려한 사람으로 생각하세요. 매일 GV 관객과의 대화에 잘 차려입고 나와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시는 거죠. 그런 모습만 보고 영화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번역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오늘처럼 멀쩡한 차림으로 외출해서 인터뷰를 하는 일은 드뭅니다. 1년 365일 중에 350일은 츄리닝 입고 작업실에 갇혀서 자막 번역만 하고요. 34인치 와이드 모니터, 24인치 와이드 모니터, 기계식 키보드 2대 들고 전쟁 같은 작업 현장으로 매일 매일 출근해요.

때로는 번역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하는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고독하고 어렵습니다. 내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 객관화를 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갖춰야 하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한계를 알지 못하고 교만해지기 쉬워요. 주위의 칭찬과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내 실력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발전할 수 있고, 이 일을 오래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괴로운 연속극과 같고 행복은 짧은 광고와 같다'. 저는 이 대사에 너무 동의해요. 번역가라는 직업은 욕을 먹는 직업이거든요. 이제는 연속극으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글 유성호

hank@eoeoeo.net



EO(Entrepreneurship & Opportu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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