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동안 미처 몰랐을 3.1운동의 진짜 의미

조회수 2019. 3. 1. 19:5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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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의 끝나지 않은 외침

역사 교과서 속 삼일운동, 

진짜 식상한(?) 삼일운동,


근데 말예요, 

한 번이라도 삼일운동에 대해 

제대로 알아본 적 있나요?

100년 전 그날이 아직도 진행 중..?!

(무슨 말일까)


지금부터 100년 전 삼일운동의 이야기, 

총정리 해드릴게요. 

1910년 시작된 일제의 식민 지배. 우리 국민들은 35년이란 시간 동안, 일본을 상대로 끈질기게 싸웠죠.


이 기나긴 싸움 중에서도 가장 구심점이 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삼일운동이었어요.

시작은 1919년 2월. 일본 동경에서 공부 중이었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독립을 갈망하던 이 젊은 학생들은 일본 땅에서 계획을 세웁니다.


이들은 천조각 위에 쓴 글을 모자 속에 숨겨 국내로 들어왔고,


(지금의 중앙고)

이곳 서울 종로구의 중앙학교(현 중앙고)를 찾아가 교장 선생님 등을 만나 글을 전달하며 상의를 했죠.


어린 학생들이 적진의 한복판에서 조국 학교까지 들고 온 이 글이 2.8 독립선언서의 초안이자 3.1 운동의 방아쇠가 될 줄, 그때 그 학생들은 알았을까요?


1919년 2월 27일 밤,

서울 종로의 보성사에서 달가닥달가닥 인쇄 소리가 들려옵니다.


(2019년 현실 장소.jpg)

직원들을 모두 퇴근시킨 뒤 커튼을 치고 극비리에 인쇄하던 것은 


바로..


그러나 한창 인쇄를 하던 중 순찰하던 형사의 검문에 걸려 버립니다.


당시의 오천원은 형사 월급의 125배였다고 하네요.


이 오천원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이 2만 1000장의 독립선언서가 전국 방방곡곡에 배포되지도 못하고, 독립선언은 그냥 흐지부지 잊혀져 버렸을지도...

우여곡절 끝에 삼일운동을 위한 준비는 모두 끝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인 3월 3일에 독립운동을 진행하려 했지만, 승하하신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천도교의 반대에 미뤄졌고,

그 전날인 3월 2일은 주일이라는 기독교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땅땅!!)

그리고 대망의 3월 1일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속속 공원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당일날, 민족대표 33인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 이런 사연이..)

민족대표들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일제에 조선 독립 선언을 알리고는 체포됐습니다. 



그럼...역사 교과서 속에 있는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운동은 대체 어떻게 시작된 걸까요?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어른들을 뒤로하고 나선 건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학생들이 태극기와 선언서를 시위 군중에 나눠주며, 

만세 소리는 봇물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광화문,
대한문,
서울 도심 곳곳에서,

근데, 이 100년 전의 만세운동이 아직까지 진행중이라는 게 무슨 뜻이냐고요?

삼일운동부터 국민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공화 만세’

더 이상 천황이나 ‘왕’은 필요 없는, 국민 모두가 주인이 되는, 그런 나라를 삼일운동 때부터 꿈꾸게 된 거죠.


삼일운동 이후, 1919년 4월 임시정부 임시헌장 제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정해졌고, 


민주화를 위한 국민들의 수차례 투쟁 끝에 1987년 개정된 지금의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우린 촛불집회를 통해 새로운 역사의 한 장면을 한 번 더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 우린 또 어떤 역사를 써내려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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