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러'의 회고.."나는 시다바리였다"
※ 다음 글은 잡플래닛에 제보된 사연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영화 <친구> 하면 떠오르는 대사가 하나 있으실 겁니다. 극 중 동수(배우 장동건)가 준석(배우 유오성)에게 건넨 그 한 마디, "내가 니 시다바리가?". 시다바리는 시쳇말로 '쫄따구' 정도 됩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하는 개방형 국어사전 '우리말샘'에는 "일하는 사람의 곁에서 그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갑자기 '시다바리' 얘기냐고요? 몇 년 전에 다녔던 작은 회사에서 저는 그야말로 특정 임원의 '시다바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임원은 회사에서 성차별과 갑질로 유명했습니다. 커피는 항상 치마를 입은 여직원이 타야 했습니다. 만약 여직원이 바지라도 입고 커피를 타 주면, "네가 바지 입고 커피 타서 미팅 망쳤다"는 식으로 탓하기도 했지요. 한 번은 커피에 물이 좀 많았나봅니다. 그러니까 욕설과 함께 "탕약 끓여왔냐"고 노발대발 소리를 지르더군요.
그런데 사내 인사로 제가 그 분을 모시게 되면서, 제 회사 생활은 한 마디로 고생길이 훤히 열리게 됐습니다.
우선 그 임원은 지방 출장이 굉장히 잦았는데요. 저는 그때마다 차를 몰고 사택에서 기차역까지 '셔틀'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아침 7시 기차면 새벽부터 집에서 나와야 했고요, 밤 10시 도착이면 사무실에서 기다리다가 역으로 가야 했던 거죠. 꽤나 고됐지만 이것도 제 일이라 견디고 있었는데요.
어느날 그 분이 기차역에서 차에 타더니 경주빵을 주더라고요. "출장 다녀오는 길에 사왔다"며 "부모님이라도 갖다 드리라"면서요. 저는 꽤나 감동했습니다. 갑질과 호통으로 유명한 사람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데, 이게 웬걸. 사택에 모셔드리고 열어봤더니 몇 개 빼 먹었더라고요. 정말 그때의 그 배신감과 허탈함이란.
매일 아침 6시까지 주요 일간지를 책상에 깔아놓는 것도 제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집에서 회사까지 차로 1시간 반 정도 거리였는데요. 새벽 4시 반에 집에서 나와 신문 챙겨서 전무 책상에 펼쳐놓고, 다 읽으면 함께 아침 식사까지 하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저녁에 일찍 퇴근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지요.
심지어 주말에는 은근히 사역을 압박하더라고요. 그분이 당시 주말농장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주말만 되면 저는 물론이고 다른 직원들까지 불러서 일을 시키려고 하더라고요. 말은 "자율이니 도와달라"고 하는데, 부하 직원에게 어디 그렇게 들리는가요.
그리고 피곤해서 쉬려고 하면 몇몇 팀장들이 나섭니다. "좀 도와드려라. 너희들은 왜 그렇게 충성심과 의리가 없냐"고 중간에서 타박하는 거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그때처럼 와닿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다행히 지금은 다른 회사로 이직했습니다. 이제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업무에만 집중하고 지내면서 화도 많이 누그러졌지만, 그때 그 분을 다시 만나면 꼭 얘기하고 싶습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정세영 기자 sy.chung@company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