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주의 인식이 달라져야 좋은 건축이 만들어진다.

조회수 2018. 10. 28. 10:0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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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건축문화를 위한 시작 (1부)
설계도면집 한 권 속에는 수천시간의 생각과, 여러 날의 밤샘과, 건축가의 청춘이 담겨있다.

건축설계는 서비스업?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다 보면 마치 계약을 진행할 것 처럼 의뢰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일단 어디에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은지 건축주 의견을 듣고, 건축이 가능한지, 예산은 어느정도 필요하고, 무엇이 계획되어야 할지를 함께 논의한다. 이후 대지를 답사하고, 전문가로서의 조언을 드린다.

 

이렇게 계획하는 건축물의 규모와 윤곽이 잡히고나면 비로소 설계용역비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는데 설계업무가 복잡하고 공사비 책정이 까다로운 경우에는 설계 계약 이전에 소액으로나마 검토용역 계약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계용역비와 검토용역비를 언급하는 순간, 설계를 진행하지 않겠다며 죄송하다거나,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건축주는 ‘마트에 가도 시식코너가 있고, 옷을 사도 한번 입어보고 사는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비 건축주들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가설계를 열심히 해준 사무실은, 당신과 계약해서 설계를 열심히 진행해야 할 시간에도, 여러 개의 또 다른 가설계를 열심히 해주고 있을 것이라고.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감기가 다 나으면 진료비를 낼게요' 라고 할 수는 없듯, 설계 이전의 검토를 위해서도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한 것을 인정해주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건축설계는 엄밀히 서비스업에 속하지만 공짜로 가설계를 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러한 경향이 건축계 전반에 통용되길 기대해본다.

▲ 제천 장곡리 단독주택 / 박정연 건축가

도면 좀 잘 뽑아주세요?


‘3층에는 방 2개를 크게 뽑아주시고, 이쪽에 이 공간도 크게 뽑아주세요.’ 


통용되는 표현일 수 있으나 듣기에 상당히 어색함이 느껴진다. 많은 건축주들을 만나다 보면 이 표현을 수차례씩 듣는데, 가끔은 ‘설계는 가래떡 뽑듯이 뽑는 게 아닙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진다. ‘잘 설계해주세요’. ‘좋은 공간을 만들어주세요’ 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건축물 하나가 완성되기 위해서 적게는 수십 장, 많게는 수백, 수천 장의 도면이 필요하다. 건축주와 협의를 하고,인허가를 받고, 공사용 도면을 그리고, 현장 여건에 따라 변경되기도 한다. 건축주의 요청에 의해 도면 납품 후, 혹은 공사 중에도 도면이 변경되기도 한다. 이러한 도면 한 장 한 장이 만들어지기 위해 수많은 생각과 스케치와 검증이 필요하다. 수백 번의 수정이 가해지는 경우도 있다.

 

설계도면집 한 권 속에 수천시간의 생각과, 여러 날의 밤샘과, 몇 건축가의 청춘이 담겨있으리라 생각해준다면, 그 도면을 받아들 때의 마음이 조금은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면적은 크게, 기간은 짧게, 공사비는 싸게?


학창시절 안도 타다오라는 유명한 일본 건축가가 아주 단순해 보이는 작은 주택을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설계한 것을 보고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실무를 진행하다 보니, 넉넉한 설계기간은 꼼꼼한 도면을 만들고, 이 도면은 공사비가 크게 변동되지 않고, 공사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제때에 준비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설계기간에 여유가 있다면 건축주 입장에서도 도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 제천 장곡리 단독주택 / 박정연 건축가
▲ 이천 도자예술촌 갤러리주택 / 박정연 건축가

반면 건축주 중에는 면적은 최대로 만들어달라, 그러면서도 총공사비는 싸게 하자, 도면도 안 그려져 있고 인허가 기간도 필요한데, 공사는 당장 다음 달부터 시작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넓게'와 '싸게'는 동시에 성립되기 어려운 내용이고, 빨리 만들어진 건물이 좋은 건물이 되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여느 동네에서 보이는 찍어내듯 똑같은 형태의 건물을 원한다면 '싸고 빨리가'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가족의 삶을 담아내고, 살기에 딱 맞는 집은 그보다는 더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건축주 입장에서는 무조건 저렴한 설계비가 당장의 이득일 수 있다.


하지만 설계비를 적절하게 책정하면 그만큼 완성도 있고 자세한 도면이 많아지며, 궁극에는 시공과정과 이후 유지관리 측면에서 설계비 차이의 몇 배를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 좋은 건축이란 바로 올바른 인식에서 시작된다.



. 박정연 (그리드에이 건축사사무소 대표) / 031-8013-0343 / www.grid-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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