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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일상에 지쳤다면 무궁화호를 타러 가자

만신창이가 된 나를 위로하는 ‘승부역’에 가야지

그곳은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내일로를 타지 않았다면 내 평생 갈 일도 없을 곳이 분명했다. 편의점, 피시방은 물론, 심지어 교회도 없는 이 곳은 내게 언제나 2차원과 3차원 사이에 끼인 공간 같은 느낌을 준다.

가을의 승부역 ⓒ한국관광공사

출처 : 한국관광공사

승부역, 나와의 첫 만남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철도역사에서 무료 1박을 재워준다니, '내일러'에게 얼마나 탐나는 제안인가. 그렇게 승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석사가 있는 영주에 들러야 했다. 기차는 딱 세 번 있었다. 아침 시간에 1번, 점심시간에 1번, 저녁 시간에 1번. 그야말로 삼시 세끼 기차인 셈이다.

승부역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이제 겨우 저녁이 되었는데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워서 놀랐다. 역무원 아저씨가 나와서 숙소를 안내해주셨다. 거실이 통유리로 된 아름다운 숙소였다. 혼자 잠에 드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날이 왔다. 눈을 떴더니 새하얀 설원이 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승부역 영암선 개통기념비 주변

나가는 기차를 놓친 내게 역무원 아저씨는 컵라면을 건넸다. 친절한 맛이 났다. 다음 기차를 놓친 나는 마음 놓고 산책을 시작했다. 역전에는 강이 흐르고, 그 건너에는 절벽이 있었다. 근처 텃밭에는 상추와 깻잎이 크고 있었다. 역무원 아저씨는 텃밭에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먹으라고 권해주셨다.

대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이곳은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땅에서 키운 걸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강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는 점도 좋았다. 밤하늘에 촘촘하게 박혀있던 별들은 태어나서 내가 자연과 이렇게 가까이에 있던 적이 있나 싶어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승부역과의 첫 만남이 가슴에 남았다.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찾아간 곳

징크스가 있다. 좋았던 곳을 다시 가면 항상 실망하곤 했다. 그래서 승부역에 다시 가지 않으려고 했다. 아름다운 기억이 행여나 없어질까 겁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승부역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처음과 다른 점이 아니었다면, 혼자가 아니었다. 세상에 단 둘 밖에 없는 곳에 가고 싶어서 그와 함께 기차를 탔다.

여름의 승부역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다리를 건넜다. 눈부신 숲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예약이라도 한 것처럼 딱 2인분만 한 계곡도 있었다.


물이 어찌나 맑았는지 안에 있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둘만의 계곡에서 실컷 놀다가 준비한 도시락을 꺼냈다. 도심의 스카이라운지가 부럽지 않았다. 어딜 가도 영화를 찍는 거 같았다.

그 여름날의 승부역

숲을 나와서도 우리는 동네 정자에서 춤을 추기도 했고, 길 한가운데에 누워있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별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혼자였으면 무서웠을 수도 있는데, 둘이라서 그런지 하나도 안 무서웠다. 그런 아름다운 것들로 승부역에 대한 두 번째 기억이 빼곡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커플처럼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헤어지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승부역에 다시 가자고 말했다.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서 그곳에 가지 못 했지만. 가끔은 생각한다. 혹시 승부역에 갔었다면, 우리는 조금은 달라졌을까?

세상에 단 혼자이고 싶은 날

오래 준비를 했던 곳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자소서를 한 달 동안 작성했다는 말도 소용없었다. 소개팅 상대가 ‘노력하시는 건 알겠는데, 아쉽게도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세상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중이었고, 이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었다. 승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없는 곳이니까 아무것에도 대답하지 않아도 되겠지.

영주역에서 승부역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 민박비도 현금으로 미리 뽑아뒀다. 꽤 오랜 시간 기차를 타고 승부역에 내렸다. 이제는 친숙한 역무원 아저씨부터 민박집 할아버지까지, 내게 아무 말도 묻지 않는다. 여자애가 왜 혼자 여기까지 왔는지부터, 가족은 누가 있고, 대학은 어디이며, 취업은 했는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승부역은 조용하게 날 맞아주었다.

따뜻한 방에서 별을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먼지 같은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적막한 산골에서 조용히 잠을 잤다. 뉴스도, 사람도, 휴대폰도 안 터지는 이곳에서야 나는 진심으로 쉴 수 있었다.

아침이 밝았다. 민박집 할머니는 국과 계란 후라이로 소박하게 멋을 낸 상을 방으로 넣어주셨다. 아침을 먹고, 방명록을 읽었다. 방명록에는 세상의 온갖 사연이 적혀있었다. 사업이 망해서 쓰린 마음을 부여잡고 푹 쉬고 간 사람. 퇴직하고 전국 자전거 일주를 다니다 온 사람. 헤어진 여자친구의 결혼식을 뒤로 하고 온 남자... 그렇게 승부역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

일상에 지친 당신이라면, 승부역으로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숲으로 갔다. GOD 노래 ‘길’에 나오는 길이 있다면 이런 길이지 않을까. 아무도 없는 숲길 사이를 걸었다. 끝없이 이어진 길을 끝까지 가진 못했다. 중간에 되돌아서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조용히 짐을 챙기고 승부역에 가서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물론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다만, 그저 담담하게 위로받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다. 이 안에서 사람에 지치거나 도시에 지칠 때, 조용히 승부역을 떠올린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일을 만나서 슬픔을 주체할 수 없을 때도 승부역의 청량함을 떠올린다. 혹시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승부역에서만은 위로를 받고, 떠날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겠지.

그리고

이 세상에 없는 ‘다른 공간‘을 원하는 누군가에게

나는 자신있게 승부역을 추천한다.

승부역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승부길 1162-5
(054-639-2647)
교통비 : 왕복 6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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