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장애환자 50명을 1명이 돌봤을 때 벌어진 참상
1970년대 미국.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뉴욕의 윌로브룩 주립병원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참상을 폭로했다.
극심한 지적 장애가 있는 환자 약 50명을 단 한 명이 돌보고 있었던 것.
이게 얼마나 심각한 취급이었냐면, 밥을 먹일 수 있는 시간이 한 명당 하루에 3분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제대로 된 관리 없이 방치된 것과 다름 없던 처참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하는 이도 있었다.
벌거벗고 자신의 분뇨를 묻힌 채 바닥에 누워서 측은한 소리를 내고 있었죠. 애절한 통곡과 같던 그 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었죠."
이처럼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당시 누구도 관심 두지 않았던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대중교통을 통한 이동은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 경사로 하나 설치해 달라는 요구에도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던 시대.
이처럼 1970년대 미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차별 받는 존재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의외의 곳에서 인권 운동에 대한 불씨가 피어오르게 된다.
바로 캠프 제네드에서다.
당시 장애를 가진 10대들을 한자리에 모았던 캠프 제네드. 이 캠프에서 강조된 가치는 자유로움이었다.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한 번 신나게 놀아보자고 모인 이 캠프가 어쩌다 장애인 인권운동의 시초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친구를 사귀는 것도, 사랑을 나누는 것도, 장애인이라서 따라오는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
이 캠프가 장애인들에게는 그동안 억압된 자아를 찾고, 자존감을 찾게 된 계기였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지도 교사였던 주디 휴만은 캠프를 다녀온 후 적극적인 행동에 들어가기도 했다.
사회에 만연했던 불평등을 인지하게 됐고, 그것에 맞서 싸우기로 한 것.
특히나 이 법에 집중했다. 재활법 504조, 차별 금지 조항.
여기에 '연방 자금을 쓰는 병원과 교육기관 교통수단 등에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디 휴만의 노력에도 재활법 504조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 이번에도 역시나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 힘을 모은 것이 바로 캠프 제네드 참가자들이었다. 정부 건물 앞에서 점거 농성에 들어가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펼친 것이다.
약 한 달 동안의 점거 농성. 캠프 참가자 외에도 수많은 장애인들이 함께했다. 이것이 바로 1977년 일어난 '섹션 504 쟁취를 위한 점거 운동'이다.
긴 투쟁 끝에 정치인들도 손을 들었다. 마침내 얻어낸 장애인의 권리.
그건 휠체어를 탄 사람도 공공건물에 접근할 수 있으며, 도시 어디든 도로를 통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버스나 열차를 탈 수 있는 권리였다.
비장애인들이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평범한 일상인 버스나 열차를 탈 권리와 모든 공공시설에 들어갈 권리. 이 기념비적인 법안의 통과는 확실히 보여줄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더는 국내 최대 소수 집단에 동등한 기회가 거부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사실이요. 이보다 못한 것은 부도덕한 것입니다."(주디 휴만)
이 같은 기본적인 권리를 얻기 위해 오랜 시간 투쟁해야 했던 이들.
장애인 민권운동 시초였던 캠프 제네드부터 한 나라의 법을 바꾸기까지 뜨거웠던 역사를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로 만나 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