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사춘기 그날의 이야기

조회수 2018. 5. 19. 14: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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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우리의 영화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의 결말에 관해 스포일러가 있는 글입니다. 영화 관람 후,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최근 흥행한 <리틀 포레스트> 속 고향은 도시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언제나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늘 옛 모습 그대로 기다리고, 옛 친구들이 변치 않은 모습과 우정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추억이 잠들어 있는 공간. 우리는 <리틀 포레스트>로 힐링을 받았지만, 사실 알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채, 오롯이 나만을 기다리고 있을 공간은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리틀 포레스트>가 고향과의 재회라면, <레이디 버드>는 고향과의 이별을 말한다.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지만, 예전 같을 수는 없을 고향과의 이별이다. ‘이별의 모양’이 주인공의 이름이자, 영화의 제목인 ‘레이디 버드’에는 이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

출처: <레이디 버드>

‘버드’의 의미


'lady bird'의 사전적 의미는 무당벌레다. 크리스틴은 무당벌레가 되고 싶었던 걸까?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방에는 새의 몸에 크리스틴의 머리가 붙은(혹은 크리스틴의 머리에 새의 몸이 붙은) 이미지가 있다. 그녀가 말한 'lady bird'는 'lady‘와 'bird’의 합성어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 제목에서도 이 두 단어를 띄어 쓴 걸 보면, 그렇게 이해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크리스틴은 자신이 사는 새크라멘토가 지겹다. 따분하고 새로움이 없는 그곳에서 무기력함을 느끼고 희망을 찾지 못한다. <레이디 버드>에서 새크라멘토는 크리스틴에겐 ‘억압’과 유사한 의미의 공간이다. 그녀는 그 억압으로부터 저항하고 싶었고, 그 땅에서 부모가 지어 준 이름마저도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이름에 있는 ‘버드’는 새를 뜻한다. 크리스틴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 지금 발붙이고 있는 땅 새크라멘토를 떠나려고 한다. <레이디 버드>에서 관객들은 새크라멘토라는 억압의 땅에서 탈주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녀의 거침없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레이디 버드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자신의 불우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거짓말도 서슴없이 내뱉고 범죄에 가까운 행위도 한다. 자기 삶의 궤도를 바꾸기 위한 발악이다. 유쾌하면서도 발랄하고, 때로는 과감한 레이디 버드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확실히 새크라멘토는 그녀를 품기엔 작아 보인다.

출처: <레이디 버드>

‘레이디’의 의미


다음은 ‘레이디’라는 명사에 대한 이야기다. ‘버드’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이름에 드러내는데, 그녀는 그냥 새가 아니라 ‘숙녀’인 새가 되고 싶다. 숙녀는 소녀보다 성숙한 여성을 뜻하는 말이며, 레이디 버드에서는 이것을 이성과의 관계로 연결한다. 


레이디 버드는 자신을 설레게 하는 남자와의 사랑을 원한다. 이성과의 사랑 더 나아가 섹스를 갈구하는 에피소드는 다양한 감정을 전달한다. 그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모습에 놀라고, 서투른 행동에 웃는다. 그리고 그녀의 판타지가 깨지는 순간 씁쓸함이 퍼진다. 청소년기의 소녀가 성에 눈을 뜨고, 조금씩 어른이 되면서 세상의 쓴맛을 보는 이 과정은 그야말로 웃프다. 비슷한 시기의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지랄발광 17세>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이런 소란스러운 과정을 통과한 끝에 크리스틴은 그녀가 바라던 ‘레이디 버드’가 된다. 이상형이었던 남자와 첫 경험을 함으로써 ‘소녀’와 작별하고(레이디가 되고), 대학에 진학함으로써 고향의 억압에서도 벗어난다(버드가 된다). 과거와 작별한 그녀는 그렇게도 바라던 뉴욕에 가고 마침내 ‘레이디 버드’가 된 것이다. 


이 변화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보여준다. 새크라멘토에서 레이디 버드가 길을 걸을 때, 카메라는 그녀를 우에서 좌로, 뉴욕에서는 좌에서 우로 따라간다. 두 장면을 비교하면 크리스틴은 서로 반대쪽을 향해 걷는다. 그것은 단순하게는 두 공간의 거리이지만, 나아가 크리스틴과 레이디 버드의 거리, 과거와 미래의 거리다.

출처: <레이디 버드>

이별 후에 찾은 이름


그래서 그녀는 행복했을까? 영화는 ‘레이디 버드’라는 가명의 끝과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작을 동시에 담으며 퇴장한다. 원하던 레이디 버드가 되었건만, 놀랍게도 그녀는 그 이름을 거부한다. 자신의 이름을 묻는 남자에게 그녀는 자신을 ‘크리스틴’이라 소개한다. 뉴욕에 왔더니 ‘레이디 버드’라는 가명이 촌스러워 보였던 걸까.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을 숨 막히게 했던 새크라멘토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영화에 마지막에 와서야 그녀는 부모가 준 이름을 되찾고, ‘크리스틴’ 주변에 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사실상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의 이름 찾기 여정이다. 공기처럼 늘 곁에 있어 의미를 몰랐던 새크라멘토는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행복, 가족의 사랑이 넘치던 곳이었다. 그녀를 질식시킬 것만 같던 것의 정체는 가족과 친구의 풍만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서야 그걸 느꼈고, 아마 당분간은 좀 더 향수병에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야 해도, 지금까지 그러했듯 그녀는 잘 해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며 영화관을 나설 것이다. 

출처: <레이디 버드>

* 외부 필진 영화읽어주는남자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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