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스 룰'에 숨겨진 혐오

조회수 2018. 3. 21. 16:5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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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그레이엄과 마이크 펜스의 이야기다.

‘펜스 룰’의 본래 명칭은 ‘빌리 그레이엄 룰’이다. 미국의 개신교 목사인 빌리 그레이엄이, 아내 외의 여성과는 절대로 단둘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운 데서 유래했다. 그렇다면 빌리 그레이엄은 누구인가.

빌리 그레이엄. ⓒReproducao

그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개신교 전도사였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영적 자문’으로 활동하며 온갖 정치력을 발휘했고, 냉전과 걸프전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에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전술을 직접 설계하여 닉슨 대통령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여성에 관해서는 ‘여성의 참된 본분은 아내이자 딸이자 가정주부로 사는 것’이라 설교했고, 동성애에 관해서는 ‘문명을 거스르는 죄악’이며 에이즈는 ‘타락한 자들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다. ‘사탄’, ‘포르노 제작자들’ 운운하며 유대인을 혐오했고, 본인의 육성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되기 전까진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며 발뺌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룩한 개신교 복음주의 연합체는 지금도 혐오와 차별, 종교적 광기의 온상이 되고 있다.


그가 내세운 ‘빌리 그레이엄 룰’을 현재 미국의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가 차용하면서 ‘펜스 룰’이 우리에게는 더 친숙한 용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마이크 펜스는 또 어떤 인물인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REUTER

‘마이크 펜스가 무서워 차마 트럼프를 탄핵하지 못하겠다’는 미국인들의 푸념을 심심찮게 듣는다. 트럼프가 탄핵된다 해도 차기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부통령인 펜스가 행정부 수반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는데(박근혜 탄핵 후 황교안처럼), 알고보면 펜스가 트럼프보다 더 위험하고 악마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마이크 펜스도 빌리 그레이엄과 마찬가지로 보수적 개신교도다. 그는 여성의 임신중절권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며, 트럼프 집권 직후 임실중절 관련 의료 서비스에 대한 외부 지원을 차단한 것이 ‘자랑스럽다’며 트위터에 게재했다. 임실중절 반대 시위에도 참석하여 연설하였고, 중산층 이하 여성들의 계획 출산에 연방 기금이 지원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는 데 결정표를 행사하였다.


창조론 신봉자로서,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학교에 국세를 지원하는 것에 찬성하며 ‘기도를 위한 국가의 날’ 행사에 트럼프와 함께 참석하여 그로 하여금 신앙을 위시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도록 했다.


펜스는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동성애 혐오 단체 (‘Focus on the Family’, 동성애는 ‘사탄의 거짓말’이고 트렌스젠더는 ‘정신병’이라고 설파하는 단체이다)의 창립 40주년 행사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군대 내 트렌스젠더의 의료 서비스 지원을 막기 위해 의회에 압력을 행사하였고, 트럼프는 이에 맞춰 트랜스젠더의 미군 복무 전면 불허 방침을 발표했다.

ⓒREUTER

‘미투’ 운동에 반하여 여기저기서 거론되고 있는 ‘빌리 그레이엄/펜스 룰’은 여성을 욕망의 대상 아니면 남성을 유혹하는 존재(이른바 ‘꽃뱀’)로 정의하는 기독교 신화의 세계관을 그대로 답습한다. 빌리 그레이엄과 마이크 펜스, 이 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운 원칙은 ‘남성이 주의하자’가 아니라 ‘여성을 주의해라’를 골자로 한다. 윤리적 신념으로 포장하려 애는 썼지만 결국은 혐오 전파의 교묘한 방법론일 뿐이다.


그 외에 ‘빌리 그레이엄/펜스 룰’의 내적 논리가 얼마나 허술하고 천박한지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매체에서 지적되고 있으므로) 굳이 서술하지 않겠다. 나는 매우 불쾌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빌리 그레이엄과 마이크 펜스의 이름을 딴 원칙 아닌 원칙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현실이 창피하다. ‘히틀러 룰’, ‘스탈린 룰’, ‘빈 라덴 룰’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느껴질 섬뜩함과 거부감이, ‘빌리 그레이엄 룰’과 ‘펜스 룰’이 내 귀에 들려올 때마다 똑같은 진폭으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 외부 필진 '정중원'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정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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