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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을 보며 마냥 감동에 젖을 수 없는 이유

조회수 2018. 1. 3. 17: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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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으로 나오는 교도관 안유는 고문가해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슴이 뜨거워지는 영화였다. 뜨겁다 못해 끓어 넘치게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었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 <1987>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어처구니없는 거짓 발표로 잘 알려진 사건 말이다. 그리고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다루고, 마침내 6 · 10 민주 항쟁까지 이어진다. 스물두 살 대학생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광장의 거대한 함성, 그 역사의 흐름을 다뤘다.

ⓒ1987

할 말이 많아지는 영화였다. 그래서 오히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게 됐다.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 서사는 그 자체로 워낙 영화적이었다. 장준환 감독의 과장되지 않은 연출도 돋보였고, 배우들의 연기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등 여섯 명의 주연 배우를 비롯해 특별출연을 한 설경구, 강동원, 여진구, 오달수, 김의성, 문성근, 우현, 문소리, 고창석 등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수많은 배우도 빛났다. 그들은 분량과 관계없이 뜨거운 열정을 보여줬다.


영화가 주는 감동이나 배우들의 열연 혹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가치 등에 대해선 이미 수많은 기사가 이야기했을 테니, 이 글에선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987>을 보면서 감동에 젖는 한편, 가슴 한켠에 계속해서 웅크리고 있던 불편함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1985년 구미유학단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인 강용주 씨가 <1987>을 두고 고문의 가해자인 안유가 미화된 영화라며 보이콧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강용주씨 페이스북 캡처

"고문가해자 교도관 안유가 의인으로 나오는 <1987>을 보지 않겠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 교도관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등포 구치소 보안계장 안유는 조한경(박희순), 강진규가 가족 및 경찰관들과 면회하는 자리에 입회하면서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된다. 경찰이 명백한 물 고문으로 인한 사망을 단순한 심장 쇼크사로 조작하고, 그 대상자도 조한경과 강진규 두 사람으로 축소하려던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안유는 당시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재야 민주투사 이부영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린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이부영은 친분이 있던 교도관 한재동(유해진)을 통해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는 편지)를 부탁하고, 한재동은 그 편지를 재야에서 활동하던 민주화 운동가 김정남(설경구)에게 전달한다. 김정남은 성명서를 작성해 함세웅 신부에게 보냈고, 명동성당에서 열린 5 · 18 추도 미사가 끝난 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그 어떤 영화보다 극적이다.

ⓒ1987

"그는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줬어요. 그가 현직에 있을 동안에는 일체 얘기를 안 했다가 지난 2012년 25주년 때에야 얼굴을 공개했죠. 그 뒤 퇴직 간부들이 그를 왕따 시킨다고 해요.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배신자라고 욕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프죠." (이부영)

한겨레, 급히 적네, 박종철 사건이 조작됐네… 6월 부른 '감옥 편지'

그 때문에 영등포 교도소 보안계장 안유(최강일)와 교도관 한재동(유해진)은 '의로운 교도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1987>은 딥 스로트(내부 고발자) 안유라는 인물을 철저히 의인으로 그려나간다.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이고, 이를 위해서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과도 맞선다. 아무래도 그가 세웠던 공을 높이 샀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부영 전 의원과 같은 민주인사들의 진술만을 토대로 캐릭터를 구성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강용주 의사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제게 인간 이하의 가혹 행위를 가한 대구교도소의 그 보안과장이 바로 KBS 다큐멘터리(<시민의 탄생>)에 출연한 6월항쟁의 '딥스로트'입니다. 1992년은 87년 6월항쟁으로 독재정권의 야만적 전향공작이 사라졌다고 여겨진 시기였습니다. 광주나 전주로 이감 간 사람들은 징벌방 수용이나 전향 강요를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구교도소 보안과장의 손으로 전향공작을 당했습니다.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 준' 바로 그 사람 손에서 말입니다."

경향신문, '딥스로트'의 이중잣대

ⓒ1987

강용주의 폭로에 등장하는 '대구교도소의 그 보안과장'이 바로 안유다. 안유는 90년대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전향 공작을 펼치며 고문을 가했다. "당시 재야인사와 대학생 등 공안 관련 사범들을 감시하고 회유하는 역할을 했다"(<오마이뉴스>, 25년만에 얼굴 드러낸 박종철 사건 폭로 주역들)고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 이전에도 같은 일을 해왔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1987>은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안유라는 이중적인 인물을 단순히 의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유라는 인물과 그가 했던 내부 고발의 중요성은 충분히 이해된다. 또, 그가 '변절자'로 불리며 교정계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처지가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고문가해자'라는 것도 변함없는 객관적 진실이다. '안유=가해자'라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감추는 건 결국 미화인 셈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영화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잘 나가는 영화에 웬 트집이냐고? 감동적인 영화에 웬 태클이냐고? 그리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그 누구도,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자신에게 가혹행위를 저질렀던 사람이 버젓이 의인으로 나온다면, 과연 당신은 뭐라 말할 것인가. <1987>을 보며 마냥 감동에 젖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1987>도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세심하지 못함에 더욱 불평할 수밖에 없다.

* 외부 필진 '버락킴너의길을가라'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버락킴너의길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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