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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비용

조회수 2017. 3. 27. 22: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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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담임 선생은 공짜 밥을 먹을 사람은 신청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도박에 미친 아비가 우리를 떠난 지 한해쯤 뒤, 담임선생은 공짜 밥을 먹을 사람은 신청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나는 내가 가난한 게 부끄럽지 않았다. 사실 부끄럽지 않았던 건지, 누군가에게 가난을 고백하는 것보다 엄마의 고된 하루하루가 더 보기 싫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자신 있게 급식 신청서를 작성해 담임에게 제출했다. 당시 급식비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한 달에 5만 원 가까이는 되었을 거다. 우리 엄마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돈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내 가난을 팔고도 남을 액수였다. 아직 어렸지만, 그만한 계산은 눈에 들어왔다.

‘공짜 밥’을 위한 고백 

요식적인 절차가 있다며 선생은 나를 사람이 없는 상담실로 불렀다. 스물일곱,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던 선생이었다. 선생은 ‘공짜 밥’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내가 얼마만큼 가난한지를 보고해야 한다는 말을 둘러둘러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백했다. 아버지란 자는 도박에 미쳐 우리를 떠났으며, 생활비를 갖다 주기는커녕 도박 빚만 잔뜩 안겼고 그걸 갚느라 우리 엄마는 장시간의 노동에 허덕이며 종종 분에 차서 방구석에서 운다고 이야기했다. 담담할 줄 알았는데 열다섯짜리 애는 그 이야기를 하다 그만 엉엉 울었다.

선생도 능숙하지는 못했나 보다. 꼬맹이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선생은 견디다 못해 눈물을 훔쳤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생은 알겠다며 나를 토닥였다. 이후 나는 중학교 졸업 때까지 급식비를 내지 않았다. 선생은 종종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았고 생계가 급박한 애들에게 주는 장학금을 한 번 신청해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떤 지원을 받기 위해 가난을 고백하는 날 울지 않게 되었다. 미안해하던 선생의 모습이 떠올라 내가 더 미안해졌던 그날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요식적인 절차에 감정을 이입하는 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나는 운이 좋아 좋은 선생을 만났다 

내가 그때 만났던 선생이 좋은 선생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어른이 되고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뉴스에서 보았을 때였다. 공짜 밥 같은 걸 신청해야 할 때, 어떤 선생이나 공무원들은 무례하거나 무미건조하게 가난의 증명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게 무섭거나 걱정돼 지원을 포기한 이들도 있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서류상의 숫자와 자신의 처지가 달라,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탈락했다고 한다.

나는 운이 좋아서 좋은 선생을 만났다. 그날의 기억이 상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그 선생 같지도 않고, 모두가 그때의 나 같지도 않다. 가난을 증명해 복지를 제공받는 시스템은 여간해선 누군가의 상처를 피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그건 딱히 선생의 잘못도 아니었고 학생의 모자람도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시스템이 결정될 때까지 치열한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은 한다. 보편적 복지는 대상을 선별하는 데 ‘검증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하고 선택적 복지는 수혜자에게 자원을 집중할 수 있어 더 ‘효율적’이라고 한다. 크게 두 축에서 세세한 각론들을 비교해서 더 비용이 적고 효율적인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비용에는 갑자기 고백을 강요당한 열다섯짜리 어린애의 상처나 그걸 강요하게 함으로써 잠시 자신의 역할에 혼란을 느꼈을 선생의 미안함 같은 게 포함될 리 없다. 정치권력은 여러 사람의 욕망과 아우성 앞에서 최대한 공정하게 결정하겠다며 책상머리 보고서에 올라온 숫자들을 두고 어떤 선택을 할 테고 그렇게 결정된 숫자에 오늘도 누구는 구속받을 것이다.

나는 정치권력이 꽤 합리적인 방식으로 많은 것들을 고려해 그런 선택을 내렸다고 믿지만, 종종 그렇게 선택된 결과들이 숫자 너머의 사람들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쉬워한다.

포털 검색어에 오른 “세월호 인양 비용” 

며칠 전 인터넷 검색어 맨 꼭대기에는 ‘세월호 인양 비용’이 올랐다. 나 자신을 속물이라고 여기던 나였지만, 참 사람들이 너무한다며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세월호 인양이 ‘비용’이라며 우리가 이걸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면 총체적으로 허술했던 구조 시스템, 부실했던 선박관리 체계, 비상 상황에서 행정부서의 명령체계 같은 것들을 그대로 두는 것도 비용 아닌가?

미국인들은 9.11을 기억하기 위해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 현장에 ‘내셔널 셉텝버 11 메모리얼 & 뮤지엄'(National September 11 Memorial & Museum)을 건설했다. 9.11을 기억하기 위해 그 비싼 부지를 할애한 이유가 비용 계산을 못 해서였을까?

매번 ‘감방에 있는 인간들 밥 주는 것도 아깝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교정 비용이 망가졌을 때 우리가 감당해야 할 비용을 고려하기는 할까? 그렇게 계산 잘하는 인간들이라면 제대로 계산해야 할 것 아닌가. 솔직히 따지자면 현재진행형인 죽음을 한 치도 헤아릴 생각 없이 매사에 ‘비용, 비용’ 거리며 당신들도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 아닌가?

비단 사람들의 비아냥만 화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기술 평가에서 최하점을 받은 상하이샐비지가 인양업체로 선정된 단 하나의 이유는 ‘적은 비용’ 때문이었다고 한다. 담당 부처는 유가족의 제안을 무시하고 가장 적은 비용을 선택했지만 결국 애초에 다른 업체들이 제시한 만큼의 비용이 들어갈 거라고 한다. 그리고 세월호는 그만큼 인양이 늦어졌다. 유가족의 괴로움은 또 그만큼 길어졌다.

눈물의 비용

어떤 선택을 하기 위해 비용을 고려하는 게 피치 못할 일이라는 거 안다. 다만, 우리가 비용을 산정하는 방식을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방에 상처받고 속이 썩어나가는 사람 천지다. 우리가 정하는 숫자들은 너무 조악해서, 그렇게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내팽개친 채 ‘효율’로만 달려가면 그만이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지하철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을 처리하는 비용과 역사마다 스크린도어를 설치해 그것을 막는 비용 중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지 고민하는 사람 대신, 사람들이 지하철역에서 몸을 내던지는 이유에 대해 마음 아파하며 고민하는 사람이 결정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당장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묻는다. 스물일곱 먹은 담임선생은 열다섯짜리 나와 함께 울었다. 그날 나와 선생의 눈물은 고려될 수 없는 비용일까?

출처: Marco, “sorrow”, CC BY
왜 당신의 눈물은 나의 고통은 우리의 슬픔은 그들에게는 ‘비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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