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청운동 고갯길 버려진 물탱크의 놀라운 변신

조회수 2018. 2. 5. 15:13 수정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양진석의 교양 건축] 옛 수도가압장 부지를 '윤동주문학관'으로 리모델링..녹물 자국 등 그대로 살려

서울 종로구 자하문터널 위쪽,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 주옥 같은 시로 사랑받은 민족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이 문학관은 청운중학교를 지나 서울 성벽으로 이어지는 언덕 입구에 들어섰다.

출처: 다음지도
윤동주문학관 위치.

경복궁 바로 뒤에서 서울 전체를 굽어보는 북악산을 바라보는 곳에 있다. 가보지 않은 이들은 이곳을 꽤 근사하게, 큰 규모로 지어진 건물로 상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과거 동네에서 가정으로 수돗물을 공급하던 네모 반듯한 편의점 크기 정도의 하얀색 수도가압장이 있었다. 가압장은 1974년 지어졌고, 2008년 용도 폐기됐다.

건축가 이소진이 리모델링한 윤동주문학관 입구. /조선DB
윤동주문학관 전경. 종로구청의 요청으로 2011년 건축가 이소진씨가 리모델링했다. /아뜰리에 리옹 서울 제공
2009년 당시 윤동주문학관의 모습. 입구 상단에 윤동주문학관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보인다. /아뜰리에 리옹 서울

윤동주가 산책하며 시상 떠올리던 곳

당시 종로구청은 이 가압장을 가치있게 활용할 방안을 궁리했다. 그러던 중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무렵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했고, 이 주변을 거닐면서 시상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스토리가 가미되면서 2009년 낡은 수도가압장은 윤동주문학관으로 변신했다.  


사실 처음 개관했을 때 모습은 볼품이 없었다. 기존 가압장 건물에 ‘윤동주문학관’이란 현수막을 덩그러니 걸어 놓은게 전부였던 탓이다. 결국 이 건물은 2011년 건축가 이소진씨가 새로 리모델링했다. 

제1전시장 내부. /조선DB

윤동주문학관은 총 3개의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입구에 있는 제1전시장은 원래 건물의 형태를 최대한 유지했다. 기존 동네 풍경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건축가의 섬세한 배려다. 사실 윤동주문학관에는 시인과 관련된 전시품이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대부분 제1전시장에 모여 있다. 

물탱크 지붕 걷어내 中庭처럼 활용

이 문학관이 유명해진 건 전시 자료 때문이 아니다. 물탱크를 재활용한 제2·3전시장 덕분이다. 건축가는 리모델링을 하면서 바닥 면적 55㎡(약 16.6평), 높이 5m 좁은 구조물인 2개의 물탱크를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용도를 다한 산업시설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변신하는 외국 사례처럼 국제적인 흐름에 맞춘 것이다.

물탱크 지붕을 걷어내고 제1전시장과 제3전시장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었다. 열린 공간으로 제2전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DB
중정같은 이 공간을 통해 하늘을 바라 본 모습. /아뜰리에 리옹 서울

제1전시장을 돌아보고 나면 한쪽 구석에 검은 철문이 있다. 이 문을 통과하자마자 등장하는 묘한 느낌의 복도 공간이 바로 물탱크였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두 개의 물탱크 중 먼저 등장하는 물탱크는 지붕을 걷어 내고 문학관 본 건물과 영상전시실을 연결하는 멋진 통로로 만들었다. 중정(中庭)과 같은 공간이다. 아마 방문객들이 가장 사진을 많이 찍는 공간일 것이다.


지붕을 뜯어 낸 물탱크 벽에는 오랜 세월 물을 저장하면서 생긴 물때와 녹물 자국 등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신축 건물에서 이런 공간을 연출할 수 있을까. 물탱크는 땅과 하늘을 잇는 통로가 됐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떠올리게 하는 휼륭한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제3전시실 내부 모습. /아뜰리에 리옹 서울
사람이 들어오면 센서가 자동으로 감지해 벽에 윤동주 시인에 대한 영상을 비춘다. /조선DB

작업자 드나들던 구멍이 채광창으로

제3전시장은 원형을 거의 그대로 살린 물탱크 공간을 사용한다. 사람이 들어오면 센서가 자동으로 감지해 벽에 윤동주 시인에 대한 영상을 비춘다. 더욱 압권은 바로 물탱크로 쓰던 시절에 작업자들이 드나들던 조그마한 구멍. 이곳은 고스란히 빛이 들어오는 채광창이 됐다. 윤동주 시인이 죽음을 맞았던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영화 ‘동주’에도 이 전시장이 배경으로 등장했다.


윤동주문학관은 새롭게 덧붙인 것이 거의 없다. 겉보기엔 크게 변신했다고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과 과거 설비의 독특한 구조 그 자체로 어떤 건축물보다 인상적이고 감동을 준다. 이 문학관은 실물 자료를 전시하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다. 관객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물탱크 자리를 통로로 만들어 어떤 것도 일부러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인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윤동주문학관을 뒷편 언덕에서 내려다 본 모습. /아뜰리에 리옹 서울

그렇다면 기존 건축과 다른 점은 뭘까. 바로 동선(動線)이다. 건축에서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어디로 걸어가는지, 어떤 공간을 거쳐 가는지는 아주 중요하다. 동선의 흐름을 새롭게 만든 것만으로 충분히 건축적인 메시지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건축은 치장이나 장식과 엄연히 다르다. 어떤 공간 안에는 공간만의 이야기가 있고, 메시지를 품고 있어야 한다. 폐기 직전의 물탱크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지만, 그것을 가치있게 활용한 선택은 그 자체로 ‘건축 행위’다. 건축가 이소진이 이 작은 건축물로 젊은 건축가 상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