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바꾼다, 진짜 정치 박사 갈상돈의 진주 개혁론: 진주시장 후보 갈상돈 인터뷰

조회수 2018. 5. 25. 14: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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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지방선거 특집: 진주시장 후보 갈상돈 인터뷰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어쩌다 나오시게 된 겁니까?


갈상돈(진주시장 후보): 제가 정치학을 전공했어요. 고려대학교에서 정외과 석박사를 했죠. 그사이에 기자 생활도 했고요. 제가 기자, 노조 생활을 한 경험도 있다 보니 어떤 정치를 해야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어요. 노동 갈등, 빈부 격차, 사회적 양극화와 같은 문제들을 연구했죠. 그래서 박사논문 주제도 ‘파벌’이에요.

말 그대로 ‘정치 박사’의 위엄

리: 크으… 


갈상돈: 파벌을 잘 관리하고 통제를 해야 갈등이 해결되고 노동자들도 삶이 개선될 수 있는데, 우리 정치권이 그런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는 힘도, 관심도 많이 부족해요. 갈등이 폭발할 때만 가끔씩 나타날 뿐이죠. 상시적으로 노동문제를 고민하는 정치가들이 나와야 합니다.


리: 방송 출연도 하셨잖아요?


갈상돈: 2015년 MBC 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 예전에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이었죠. 여기에서 ‘갈상돈 박사의 뉴스 브리핑’ 코너를 진행하면서 시사평론을 했죠. 그런데 10개월 정도 하는 동안 계속 갈등을 겪었어요. 한겨레, 경향에서 나오는 보도는 가급적이면 브리핑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압박이 있었거든요.


리: 그걸 대놓고 요구했어요?


갈상돈: 아무래도 경영진들도 위의 눈치를 봐야 하니까요. 미묘하게 줄을 타면서 가끔씩 선을 넘었는데, 그러다 박근혜 정부 국정원이 이탈리아 해킹팀으로부터 해킹 툴을 구입해서 도감청을 했다는 의혹을 제가 방송에서는 처음 이야기했어요. 발칵 뒤집혔죠. 그래서 결국 10개월 정도 만에 하차했죠.


리: 그 보도 이야기하고 얼마 만에 하차한 거죠…?


갈상돈: 바로 그날에 잘렸죠. 그런데 또 바로 대타를 섭외하기는 힘드니까 이번 주까지는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날도 또 해킹툴 기사를 이야기했죠. ‘어차피 잘릴 거 할 말은 다 하고 가자’하는 생각이었어요. 그걸 코너 첫 뉴스로 올려놨는데 신동호 아나운서가 계속 뒤로 밀더라고요. 그래도 준비된 게 모자라니까 결국 시켜줬어요.


리: 그렇게 하차하시고는 뭐하셨어요?


갈상돈: 대학으로 돌아가서 비정규직 연구교수로 강의를 하게 됐죠. 그때 국민행복지수에 대한 연구를 했어요. 제 책 『경청과 소통의 힘』에 마지막에 ‘국민행복지수와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논문을 실어놨어요. 그때 진행했던 프로젝트로 썼던 논문이죠.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는 경청, 그리고 소통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택한 정치 공부


리: 그럼 정치는 어쩌다 입문하게 되셨어요?


갈상돈: 제가 기자, 노조, 국제앰네스티 사무국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정책보좌관, 시사평론가 등 다양한 일을 했잖아요.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도 했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어떻게 더 좋은 정치를 이야기하고, 더 나은 시민의 삶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죠. 게다가 아까 말한 것처럼 정치 때문에 제 뜻이 꺾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현실 정치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국민의당에 들어가게 됐죠.


리: 왜 국민의당이었어요?


갈상돈: 민주당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원래 아는 사람도 없고, 기자생활할 때 교류하던 사람도 다 바뀌었고. 그런데 지도교수셨던 고려대 최상용 교수님이 안철수 대표를 계속 후원하고 계셨죠. 당시에는 안철수가 새정치를 표방했잖아요, 그래서 조금 다를 거라는 기대감도 있었고요.


리: 그러면 언제 들어가신 거예요?


갈상돈: 2016년 총선 전 2월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주 놀라웠어요. 완전 안철수 사당이었고, 새정치에 대한 기대는 할 수 없었어요. 안철수 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의 계파정치를 비판하면서 나왔는데 정작 안철수 계파가 더하면 더했어요. 지금도 안철수 사단이나 개인 조직만 움직이잖아요? 안철수가 사실 백신 연구하면서 컴퓨터와 대화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을 보고, 평가하고 또 사람을 대하는 그런 실력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고 생각하고 한 달 반 만에 탈당을 했죠.


리: 그때 공천받거나 하진 않으셨어요..?


갈상돈: 그때 진주는 아니고 서울 강동 을에 공천을 신청했는데 단수공천이 이루어지면서 탈락했죠. 공천된 사람은 당연히 안철수 사람이었고요. 마흔 된 여성 변호사였는데, 정말 아무런 정치적 비전도, 식견도 없이 권력에 대한 욕심만 있는 사람 같았어요. 그런데 안철수 측근이고 『안철수는 왜』라는 안철수 찬양 서적도 썼더라고요. 그런 사람을 제가 상대로 경선을 나섰으니까 안 됐던 거죠.

출처: 직썰
당시 갈상돈 후보를 제치고 공천을 받은 사람은 바로…

리: 방송할 때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나팔수와 악연이 많네요. 


갈상돈: 그래서 이건 비전이 없는 정당이라고 생각하고 나온 거죠. 그 후에는 국민의당이라는 제3당 실험을 강력히 비판하게 됐죠. 4.13 총선 전인 3월 31일에는 오마이뉴스에 제3정당 정치실험은 실패했다는 기고문도 썼어요.

출처: 오마이뉴스
국민의당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후보의 예언은 맞았다. 국민의당은 분당되었고,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으로 분열됐다.

리: 나오면서 그런 거 쓰면 좀 구차하지 않아요? 


갈상돈: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새누리당이 180석까지도 얻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어요. 결국 새누리당이 122석을 얻었죠. 그때 야권 단일화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면 새누리당이 90석도 못 얻었을 거예요. 그리고 국민의당은 38석을 얻었고요. 그때 지지율로 보면 국민의 35% 정도만 새누리당을 지지했어요. 나머지 60%는 민주당과 국민의당을 지지했고요. 그런데 의석수는 그만큼 안 됐죠. 단일화했으면 200석이 넘었을 거예요. 그러면 이번에 개헌도 했을 거고 그렇게 새로운 정치를 만들 기회가 열렸겠죠.


리: 그런데 저는 오히려 국민의당이라는 제3당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민주당이 압도적 리드를 하면서 정국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고 보거든요.


갈상돈: 그게 결국은 제3정당 실험은 실패했다는 뜻이잖아요. 제3정당 실험이 실패한 건 안철수의 리더십 문제에요. 본인의 고집을 꺾어서 타협도 하고 했으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 되었을 겁니다.


리: 사실 비슷한 시기에 문재인 대표도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상황은 완전 다르거든요. 이렇게 된 결정적 차이가 뭐라고 보세요?


갈상돈: 안철수는 그저 스타덤에 올라서 정치권으로 진입한 거죠. 정작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본인이 말하는 새정치가 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답한 적이 없어요. 막연한 기대감에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가 실제로는 아무런 내용이 없으니까 그 거품이 꺼지는 상황인 거죠.


리: 이번 경선에서 거의 전국 최소 차이로 승리하셨어요.


갈상돈: 그렇죠. 0.107%로 이겼으니까. 김헌규 예비후보님이 28년 동안 지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오래 살아왔다는 걸 강조했는데, 저는 온 지 4개월 조금 넘어서 사실 힘든 싸움이었죠.


리: 그런 게 지역 정치에서는 정말 이기기 힘든 거죠.


갈상돈: 일반시민 여론조사에서는 이겼는데, 당원 여론조사에서 조금 밀렸다고 해요. 사실 당원분들은 저는 오랫동안 접촉을 못 해왔고, 김헌규 후보는 열린우리당 때 출마도 하셨고, 당원들과 교류가 있어 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밀린 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진정성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고, 그 덕에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리: 아내 분은 뭐 하세요?


갈상돈: 사실 와이프가 제가 노조 활동을 하니까 불안해서 수능 공부를 다시 했어요. 그래서 4수 끝에 경상대 의대에 합격했어요. 2000년에 제가 회사에서 나왔고, 2001년에 와이프가 의대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제가 진주에 와서 학원강사 생활을 하면서 뒷바라지했죠.


리: 사모님 병원은 여기서 하세요?


갈상돈: 와이프가 의대 졸업하고 인턴, 레지던트 하던 시절에, 제가 또 고려대 정외과 박사과정에 풀타임으로 입학을 했어요. 이제 저보고 공부하라고 하더라고요. 서울에서 박사과정 할 동안은 상계백병원에 있다가 안산에 있는 병원을 다녔죠. 지금은 휴직하고 내려왔습니다. 이제는 둘 다 진주에 뼈를 묻을 생각이에요.


리: 고등학교까지는 진주에서 나오신 거예요?


갈상돈: 네, 초중고 다 진주에서 나왔습니다. 고등학교는 진주고등학교 나왔고요.


리: 그때 나름 명문이었죠? 서울대는 얼마나 갔어요?


갈상돈: 저희가 마지막 비평준화 기수죠. 그때 아마 171명인가 갔어요. 그때 아직 평준화가 안 된 학교라 경남지역 똑똑한 애들이 다 왔어요.


리: 그래서 이제 서울대를 갔나요?


갈상돈: 서울대 농대를 갔죠. 부모님이 농사지으시고 돈이 없으니까 국립 아니면 못 갈 상황이기도 했고요. 82학번으로 들어갔습니다.


리: 대학교 들어가 보니 어떻던가요? 운동이나 써클 같은 건 안 했나요?


갈상돈: 들어가 보니까 살벌했죠. 광주 직후여서 시위하면 바로 교내로 전투경찰이 들어오고, 심지어 도서관까지 들어와서 잡아갔어요. 교도관 출신 큰 형님이 기숙사비랑 생활비를 보내주셨거든요. 그러면서 데모하지 말아라, 해도 그냥 무리 속에 섞여 있어라 그래서, 그렇게 그냥 무리 속에 있는 학생 한 명이었죠. 사실 늘 죄책감으로 남아있어요. 선두에 섰던 친구들은 강제징집 당하고, 의문사 당하고 그랬으니까요… 그때 광주 비디오를 봤어요. 그걸 보고 엄청 충격받았죠. 공부도 제대로 손에 안 잡혔고요. 그래서 진로를 어떻게 할까… 사회 운동을 할까 공부를 계속할까 고민하다 4학년 때 군대를 갔죠.

출처: 한겨레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군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던 시절이 있다.

리: 제대는 언제 하셨어요? 


갈상돈: 1988년 6월에 제대했습니다.


리: 재미있는 시기는 다 놓쳤네요.


갈상돈: 그래도 제가 카투사였어요. 친구들이 강제징집도 당하고, 그때 녹화사업도 있었으니까 친구들이랑 기 쓰고 카투사 시험을 봐서 갔죠. 카투사는 외출을 많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1987년엔 주말에 외출 나오면 시위는 계속 보러 갔어요. 대선 때는 백기완 선생 연설하는 데도 따라갔고요. 정말 가슴 뜨겁게 연설하셨어요. 가슴에 오래 남았죠. 그러다 1988년 제대할 때가 되니까 이제 선택할 때가 됐는데, 사실 제가 군대에서 심한 폭력을 당했어요.


리: 카투사도 그랬군요. 한국군한테요?


갈상돈: 네, 일병 때 한국군 선임인 상병한테 당한 건데 후임 관리감독을 제대로 못 했다고 엄청 얻어맞았어요. 군화 안 닦고 옷도 안 다렸다고 후임을 패는 거예요. 그런데 온갖 잡일 다 하다 1-2시에 자는 애들이 어떻게 군화를 닦고 옷을 다려요. 그래서 그냥 제가 재웠어요.


리: 그러니까 너도 맞으라면서 때린 거예요?


갈상돈: ‘니가 더 나쁜 놈이야! 너 잘 걸렸다!’ 이러면서 엄청 팼어요. 그때는 군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었죠. 그렇게 얻어맞다가 제가 기절을 했어요. 다행히 그 후로는 후임도, 저도 안 건드리더라고요.


리: 군 문제 계속 터질 때마다 마음이 아프시겠네요…


갈상돈: 그렇죠. 군내 폭력 문제가 터질 때마다 ‘아직도 못 고쳤구나’ 하게 되고 좀 느낌이 남다르죠. 그런 경험을 하면서 정말로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일부러 군대에 있으면서도 주말마다 시위에 참여하고 했던 거고요. 그래서 정치학과 대학원에도 들어갔습니다. 운동에 그저 참여하는 게 아니라 체계적으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죠.


리: 대학원 가니까 어떻던가요?


갈상돈: 공부 많이 했죠. 그런데 석사 끝나자마자 취직했어요. 부모님이 ‘왜 취직을 안 하냐, 빨리 월급쟁이가 되어야지’ 압박해서, 기자 시험을 준비하게 된 거죠.


리: 일요신문을 택한 이유는요?


갈상돈: 나이가 드니까 시험 자격이 없더라고요. 제가 그때 서른둘이었는데. 일요신문은 그런 게 별로 없어서 일요신문에 가게 됐죠.


리: 그렇게 늦깎이로 시작한 기자 생활은 어떠셨어요? 주로 어느 쪽 취재하셨어요?


갈상돈: 저는 사회부, 정치부 취재했어요. 우리는 출입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어요. 아이템 잡아서 잠복취재하게 되니까… 인터뷰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도망가는 사람들 잠복해 있다가 잡아서 인터뷰하고 그랬죠. 당시 한보 사건 부실수사 논란이 불거졌는데, 나중에 의원도 하게 되는 최병국 중수부장을 계속 쫓아다녔어요. 인천에 쫓아갔는데 한 발 놓쳐서 배 타고 가는 걸 보기만 하기도 하고. 고현정-정용진 별거설 취재하느라 종일 집 앞에서 기다리다 사진찍기도 했고, 이회창 아들 병역비리 때는 병무청 자료 다 뒤지기도 했고요.



동료를 버릴 수 없으니 당연히 싸워야 했다


리: 그런데 왜 그만두신 거예요? 그때만 해도 기자가 대접받던 직종이었잖아요?


갈상돈: 처우도 좋았죠. 월급도 다른 데 비해서 좋았고요. 그런데 노동조합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죠. 노사 분규가 있고 나면 파업 지휘부는 회사를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기잖아요.


리: 노동조합은 언제 결성됐어요?


갈상돈: 제가 입사하고 얼마 안 있어서 결성됐어요. 제가 처음부터 대의원이었죠.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가담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부위원장도 하고, 파업 때는 조직국장이었고, 비상대책위원장도 하고 그랬죠.


리: 회사 측에 어떤 요구를 했던 건가요? 단순히 임금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갈상돈: 일단 IMF 때 30% 임금삭감을 했어요. 신입사원 때 월급보다 적게 받게 됐으니 살인적이었죠. 언제 다시 올려주겠다는 이야기도 없었고요. 그런데 그것보다도, 계약직 조합원을 해고하는 문제가 컸죠. IMF 이후에 계약직 채용이 많이 늘었었어요. 그중 몇 명이 조합원으로 들어왔는데, 일도 잘하고 특별히 해고할 이유도 없는데 재계약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조합원을 지켜야 한다고 나서면서 그게 방아쇠가 된 거죠.


리: 보통은 정규직이랑 비정규직이랑 대립하고, 정규직이 자기 이익 지키려고 비정규직을 배제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같이 돌아갔어요?


갈상돈: 그런 생각이 아예 없었죠. 비정규직도 같은 노동자고, 불이익을 받으면 같이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했죠. 또 IMF도 있지만, 회사에서 노조 결성되고 나니까 노조를 약화하려고 비정규직을 많이 입사시킨 것도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지켜줄 테니 노조 가입을 많이 해달라고 했어요. 노조 입장에서도 노조가 강해지려면 비정규직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고.


리: 사실 비정규직을 배제하면 오히려 노조가 약해지죠. 그러면 지금 노조들이 다 비정규직도 조합원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갈상돈: 당연하죠!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도 조합원으로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비정규직도 정규직이 얻는 그런 여러 회사의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같이 싸워줘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왜 비정규직으로 들어왔습니까? 특별히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잖아요, 시대를 잘못 만났을 뿐이지. 또 회사에서 노조를 약화시키고, 동일노동을 하더라도 임금을 덜 주려고 비정규직을 받는 거잖아요.


리: 그런데 요즘은 사회복잡도가 너무 높아지면서, 예전에는 성과가 예측됐는데 요새는 그런 게 어려운 면도 있잖아요. 미국 같은 경우에는 대놓고 해고가 일상화되어 있고요. 그래서 노동유연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갈상돈: 대한민국에서 노동 유연화는 곤란하죠. 복지 제도, 사회 보장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은 지금 사회에서 해고되면 다음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특히 노조 활동한 사람은 더 그럴 거고요.


리: 그런데 그런 부분은 기업이 아니라 정부가 책임지고 노동자에 대한 안정적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 아닌가요?


갈상돈: 사회보장제도 같은 문제에는 국가가 개입해야죠. 하지만 마음대로 해고하지 못하게도 해야 해요. 사실 해고자가 많아지면 국가적인 손해에요. 세금이 줄고,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보험료도 늘고요. 그래서 국가가 최대한 고용안정을 보장해서 회사가 노동자를 책임질 수 있도록 해야죠. 그리고 기업이라는 게 이윤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을 보장하는 것도 중요한 의무잖아요? 최근 CSR,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담론이 확산되는데 종업원이 좋은 삶을 꾸려서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온전히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하기 위해 기업이 필요한 거지, 이윤만 목표로 하면 이 사회가 행복해질 수가 없죠. 게다가 그렇게 하면 기업의 이미지도 좋아지고요.


리: 회사를 나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나요? 사실 그런 경우에는 웬만하면 다른 노동자들이 같이 지켜주려고 하잖아요.


갈상돈: 파업 후에 노조위원장으로 제가 단독 추대됐어요. 그런데 회사에서 ‘갈상돈은 절대로 안 된다. 갈상돈이 위원장 되면 더 이상 노사 대화는 없다’ 이래서 못하게 됐죠. 제가 파업 때 조직국장이었고, 사수대장도 하면서 파업 대오를 지키고 그랬거든요. 이미 파업을 같이했던 사람들은 회사를 빠져나갔고, 저에 대해서도 인사 조치한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리: 파업 자체는 성공적이었나요?


갈상돈: 그렇죠. 계약직 해고자 복직시키고 임금삭감도 30%에서 17%로 삭감폭을 줄였어요. 회사도 양보하고 노조도 양보했죠. 그 이후에 회사에서 시사저널을 인수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 돈이 우리 임금 삭감한 돈이었죠.


리: 어쨌든 회사에서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도 되잖아요?


갈상돈: 그런데 회사에서는 저만 없으면 노조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노조원들은 이미 35일간 파업하고, 그 이후로 많이 힘들어하는 상황이었고, 저도 그래서 타협을 한다는 생각으로 포기했죠. 게다가 그때 와이프가 수능을 계속 실패하면서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제가 회사에 계속 있으면 와이프도 힘들겠다는 생각에 그만두게 됐죠. 주말마다 운동도 같이하고, 매주 도시락 싸 들고 관악산도 올라가고요. 다행히 와이프가 그해에 붙었고, 저는 4년 정도 수학 선생을 했어요.


리: 그런데 의대는 6년 과정인데, 6년이 아니라 4년 만에 또 다른 길을 택했어요.


갈상돈: 4년 정도 지나니까 이제 와이프가 장학금도 받고 많이 안정되었고, 와이프도 이제 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서 고려대 정외과 박사과정에 들어갔죠.


리: 그동안에도 공부에 뜻이 계속 있었나 봐요?


갈상돈: 저는 공부에 대한 욕심이 굉장히 많아요. 왜냐하면 공부와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현실을 바꾸려면 이론적 무장이 잘 되어 있어야 해요. 실전에서는 이론이 적용되기 어렵다는 말도 있는데, 그냥 적용하는 게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면서 채워나갈 수 있기도 하고요. 자치단체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참모들이 도와준다고는 해도 판단, 결정은 결국 자치단체장의 책임이거든요. 여러 가지 들어오는 정보와 자료를 종합하고, 직접 찾아봐야 해요. 시장이 머리만 빌릴 수는 없는 거죠.


리: 박사 과정 공부는 어떠셨어요?


갈상돈: 제 지도교수인 박홍규 교수가 조선왕조실록을 많이 연구했어요. 또 최장집 선생으로부터는 한국 사회의 노동문제를 공부했고요. 그렇게 역사와 노동이라는 두 축을 세우게 됐죠.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이, 반복되는 게 정치라고 봅니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해야죠. 진주시에 대해서도 과거 시장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계속 보면서 반면교사를 삼아야죠.


리: 박사학위 받고 나서는 행정 일을 하셨죠?


갈상돈: 이명박 정부 때 최광식 한국사학과 교수님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가시게 되면서 저한테 정책 보좌관을 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죠. 이명박 정부 사람도 아닌데, 하지만 저를 정말 많이 도와주신 교수님이 부탁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되나 하다가 주위 의견을 물어봤죠. 그러니까 네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그러냐 하더라고요. 장관에게 들어오는 정보 다 볼 수 있고, 행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도 있고, 정책 보좌관끼리 정보를 공유하니까 결국 전체적으로 행정이 돌아가는 걸 다 볼 수 있다고요.


리: 제가 이번에 후보자분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게 확실히 관료, 행정 경험 있는 사람들이 눈이 다르기는 하더라고요. 실제로 일을 하면서 그런 걸 느끼셨나요?


갈상돈: 사실 관료주의라는 말이 있잖아요. 무사안일하고 별로 안 바뀌고, 그래서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고. 대통령한테 국정보고를 하잖아요? 그러면 공무원들이 날밤을 새워서 자료를 만들어오는데 막상 보면 지난해랑 별반 다르지 않은 거예요. 장관도 바뀌었는데 말이죠. 다른 걸 좀 해보자 하기는 했는데 쉽지는 않았죠.


리: 그래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나요?


갈상돈: 한류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전통예술을 잘 살려서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한류 장관이 되셔야 한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죠. 또 그때는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었는데 공휴일로 하자고 했죠. 그때 〈뿌리 깊은 나무〉가 대대적으로 흥행을 했거든요. 이걸 기회 삼아서 한글날 공휴일 제정을 밀어붙였고, 결국 성공했죠.

출처: 민중의소리
우리에게 휴일을 선사하신 2대 위인, 세종대왕과 갈상돈

리: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네요. 그 후에는 앰네스티 사무국장을 하셨죠? 그건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갈상돈: 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님과 친분이 있었는데 계속 사무국장을 해달라고 하셨어요. 6개월이 지나도록 채용을 못 했다고 하셔서 결국 옮겼죠. 그러면서 국보법 개정 활동하고, 위안부 수요집회도 같이하고, 노동권 강화 문제도 다뤘죠. 파업을 이유로 업무방해죄 기소당하고, 손해배상 청구를 당하는 걸 없애야 한다, 사실상 파업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또 망명객들 인권보장 촉구 관련된 시위도 하고요. 이명박 정부 문체부 고위 공무원으로 있다가 나와서는 정부의 인권정책 비판에 앞장선 셈이죠.



법이 이래서 못 바꾸는 게 아니라 법을 바꾸지 않는 게 문제다


리: 아까 공무원은 큰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요, 이번에 시장이 되시면 변화를 어떻게 이뤄내려고 하세요?


갈상돈: 공무원 사회는 잘 변하지 않죠. 시민사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괴리가 있어요. 공무원들이 더 많이 민심을 듣게 해야 합니다. 법을 바꿔서라도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행정을 추구하려고 해요. 그래서 생각하는 게 진주시민 5,000명 청원 제도입니다. 5,000명이 청원하면 이걸 시장이 의회에 조례로 제정하자고 요구하는 거예요. 또 이동민원실 같은 것도 만들려고 해요. 시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거죠. 이런 것들을 거쳐서 시민의 목소리와 시장, 의회가 만드는 제도를 일치시켜나가려고 합니다.


리: 사실 인구가 적은 도시는 아니잖아요? 시민들이 느끼는 주요 불만은 어떤 게 있을까요?


갈상돈: 먼저는 진주 경기가 죽었다는 거죠. 시 예산이 1조 2,000억 원인데, 사실 고정비용 빼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래도 1~2% 정도는 빼 와서 지역경제와 문화예술관광을 되살리는 데 투자를 하려고 해요. 그리고 여당 시장이니까 중앙에 올라가서 적극적으로 세일즈를 해야죠. 또 제가 문체부에 있으면서 문화, 예술, 관광을 어떻게 풍성하게 할 수 있을지도 많이 고민했어요. 개천예술제나 유등축제도 더 활성화하고, 1년 내내 공연을 활성화하려고 합니다. 문체부 차관 두 분부터 많은 분이 다 저와 같이 근무했던 분들이어서 협력체제도 잘 구축할 수 있을 거로 기대합니다.


리: 진주라는 도시가 특이한 게, 경제, 관광, 문화, 교육, 다 빠지지는 않는데 또 아주 빼어나지도 않아요. 최고로 끌어올리려면 어떤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갈상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선 예술 분야입니다. 유등축제나 개천예술제가 잘 되고 있지만 시민이 더 많이 참여하는 축제로 바꿀 필요가 있어요. 원래 유등축제에 300만 명이 왔는데 작년에 유료화하면서 관광객이 확 줄었거든요. 다시 무료화해서, 300만을 넘어 500만까지 나가려고 합니다. 또 여기에만 국한되어서는 지역 경제 활성화가 어려운 만큼 1년 내내 관광할 수 있는 자원도 발굴할 계획이고요. 지금 진주에 사시는 문화예술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거리 공연장을 만들어 소규모 공연도 지원할 거고요.

출처: 단디뉴스
유료입장객에 한해 축제를 볼 수 있도록 남강변에 설치된 가림막. 행사 유료화 이후 방문객은 75%가 줄었다.

리: 지금까지 진주는 정체된 느낌이었어요. 왜 다이내믹한 변화가 부족했을까요? 


갈상돈: 관료 출신은 열심히는 하시지만 큰 변화는 잘 못 하시는 면이 있죠.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아우를 수 있는 안목, 정치력, 네트워크, 활동반경 등을 다 갖고 있어야 합니다. 다양한 경험을 해온 저 같은 사람이 시장이 되어야 정말 문화예술관광도시의 명성에 걸맞게 ‘신난다’ ‘활력이 넘친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진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 이번에 지역들을 돌다 보니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게 환경과 교육이에요. 그런 면에서는 어떤 업그레이드를 꾀하고 계신가요?


갈상돈: 진주도 미세먼지가 많거든요. 초중고에 공기청정기 5,000대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한 교실에 단지 한 대로는 안 되고 여러 대를 놓아야 아이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원인을 없애야 하지만 그건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할 것 같고요. 도시 안에 나무 심기, 숲과 공원 조성 등도 지속적으로 할 계획입니다. 진주가 원래 교육도시라는 명성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그동안 잘 안 되었죠. 교육감은 진보인데 시장은 보수다 보니, 교육청이 하려는 사업도 시에서 신청을 안 해서 못하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리: 어떤 게 있었나요?


갈상돈: 행복교육지구라는 사업인데, 다양한 특별활동 지원, 진로체험교육 제공 등을 통해서 국영수 위주 공부에 흥미를 잃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진로를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입니다. 시에서 3억을 들여서 하겠다고 하면 교육청이 대응투자로 같은 액수를 지원하는 건데, 시에서 신청을 안 했으니 교육청이 할 수가 없는 거죠. 1년에 진주시에서 100명 정도가 외부의 특목고나 거창고 같은 학교로 빠져나갑니다. 평준화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 그렇다고 평준화를 없앨 수는 없잖아요. 일반고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거죠. 공부에 관심 있는 친구들에게 실력 향상을 지원해서 친구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그래서 진주 안에서도 충분히 좋은 교육을 받아 좋은 성과를 내도록 해서 교육도시 진주의 명성을 되살리려고 합니다.


리: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새누리당이 꽉 잡던 지역이에요. 이번에 교체가 된다면, 지금까지의 진주와 갈상돈의 진주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갈상돈: 과거의 여당은 잘 사는 사람들 위주의 정책을 펼치고, 선거 때마다 말로만 서민과 중산층을 말했습니다. 결국 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요. 10년 만에 바뀐 새로운 여당은 서민,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노력하죠. 저는 그런 여당의 후보입니다. 부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동행하도록 호소하고, 조화로운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시민의 목소리를 훨씬 더 경청하고 시민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그래서 진주의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시민 친화적인 진주시장이 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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