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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 그러나 꺼지지 않는 욕망: 폴란드의 짧은 역사

조회수 2018. 5. 4. 17: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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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방문은 헐리웃 스타 내한에 비할 바 아닌 빅 이벤트였습니다.

프로이센을 그야말로 ‘쳐부순’ 나폴레옹은 베를린 칙령을 발표하며 영국에 대한 경제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물리적인 전쟁이 끝났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잔여 프로이센군은 레스토크(Anton Wilhelm von L’Estocq) 장군의 지휘 하에 프로이센 왕과 왕비를 보호해 동부 프로이센으로 피난 중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서쪽으로 지원 오던 러시아군과 합류하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들과 또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싸워야 했을까요?

레스토크 장군은 하노버 출신입니다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프랑스 위그노 망명객의 후예입니다.

나폴레옹은 일단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군과 끝내지 못한 볼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의 손에 쓰라린 패배를 맛보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나폴레옹에게 항복하거나 화친을 구걸하거나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때 짜르 알렉상드르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중재 하에 더 이상의 적대 행위 없이 러시아로의 퇴각을 허락받았지요. 그 이후로 나폴레옹과 알렉상드르는 한번도 평화 조약을 맺거나 한 적이 없었습니다. 즉 그들은 아직 휴전 상태일 뿐이었지요. 


이번 제4차 동맹 전쟁도 사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주축이 된 전쟁이었습니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싸워야 했지만 실은 러시아와 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가 저 니에만 (Nieman) 강 서쪽으로 자꾸 기어 나오지 않는 이상 싸울 이유가 별로 없었지요. 황량하고도 광활한 러시아에 탐나는 것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베를린 칙령의 발표와 함께 러시아와 볼 일이 생겼습니다. 대륙 봉쇄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국과의 교역로였던 러시아의 항구들을 봉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은 싸움보다는 친구가 되자는 볼 일이었습니다. 아주 대등한 입장의 친구보다는, 말 잘 듣는 착한 친구가 필요했지요. 물론 러시아처럼 동부 유럽의 일진 노릇을 하며 자신이 아주 힘이 세다고 생각하는 왈패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 먼저 나폴레옹은 그의 주먹맛이 얼마나 호된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보통 인터넷 소설 속에 나오는 일진들의 우정 형성 과정과 아주 똑같았습니다. 자, 일진이 있다면 당연히 그 동네에서 그 일진의 셔틀 노릇을 강요당하며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대표적인 친구가 바로 폴란드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인상적으로 보았던 영화 중 〈대장 불리바(Taras Bulba)〉라는 1962년 작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줄거리는 대충 러시아 카자흐(코작) 부족들과 폴란드의 전쟁에서 카자흐 족장 불리바의 족장 아들인 안드레이와 폴란드 공녀가 비극적인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에서 폴란드는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강대국으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카자흐(알고 보면 불리바가 속한 카자흐는 원래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 카자흐지만)는 야성미 넘치고 용감하지만 빈약한 부족으로 나옵니다.

영화에서는 불리바가 폴란드군을 결국 격파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고골리의 원작 소설에서는 폴란드군에게 붙잡힌 불리바가 화형을 당하며 죽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포로가 된 그의 작은 아들도 바르샤바에서 팔다리를 하나씩 꺾는 끔찍한 처형을 당하고 죽지요.

저는 어릴 때 그 영화를 보면서, 속으로 ‘야, 한때는 저런 강대국이었던 폴란드가 어쩌다 저렇게 찌그러져서 소련 밑에 깔렸을까’ 싶어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때 비록 어렸지만, 폴란드가 그 영화 속에서 나온 것처럼 대장 불리바의 매복에 빠져서 망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거든요. 


확실한 것은, 그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원래 폴란드는 동부 유럽에서 매우 강력한 국가였다는 것입니다. 〈대장 불리바〉의 배경이 된 크멜니츠키 봉기 (Khmelnytsky Uprising)가 일어났던 17세기 중반은 폴란드가 그 강성함의 절정에서 내려오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저 반란은 폴란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우크라이나 카자흐들의 무장봉기였습니다. 실제로 이 봉기를 계기로 우크라이나가 폴란드에서 러시아의 손으로 넘어갔지요.

1772년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도입니다. 프로이센의 작은 영토와 비교가 됩니다.

하지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이는 최소한 한때 우크라이나를 지배할 정도로 폴란드가 강성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폴란드는 14세기에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의 수장인 야기엘로 대공(Wladyslaw II Jagiello)이 폴란드 왕국의 야드비가(Jadwiga) 여왕과 결혼하면서 사실상 하나의 연방체가 되는데, 이때부터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16세기 중반 루블린 연맹 (Union of Lublin)을 맺고 정식으로 하나의 연방체가 된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은 17세기 초반 절정에 달했을 때는 무려 1천만 명이 넘는 인구와 현재의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및 러시아 일부까지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대국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문물의 발달이 늦었던 동구권에서 그래도 서방과 가장 가까이 있던 폴란드가 가장 강성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 양반이 리투아니아 대공 야기엘로이자 결혼으로 폴란드 왕까지 겸했던 블라디슬라브 2세입니다.

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나름 독특한 정치 연합체였습니다. 일단 저 루블린 연맹은 당시 마지막 야기엘로 왕조의 폴란드 왕이 자식 없이 사망한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이후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의 직위에 오를 사람을 귀족들 중에서 투표로 선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폴란드 귀족 사회에서는 “왕은 군림할 뿐, 통치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있었지요. 결국 실권을 쥐었던 것은 권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선출직 국왕보다 의회였습니다. 


초반에는 민주주의적으로 잘 굴러가던 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치 체계가 다소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됩니다. 블라디슬라브 4세(Wladyslaw IV) 재위 기간 중 만장일치제도가 들어선 것입니다. 즉, 의회에서 이미 통과된 법안이라고 해도, 의회 기간 중 어느 의원이라도 “난 반댈세!(Nie pozwalam!)”라고 외치기만 하면 그 법안이 무효가 되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소수의 의견이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아름다운 인본주의 원칙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위한답시고 자기 가문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해가 가는 법안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제도였습니다. 그 결과 이후 약 2세기 동안 총 150회 열린 의회 기간 중 53회에서 아무런 법안도 통과하지 못하는 극도의 수구 성향으로 치닫습니다.

1562년의 루블린 동맹이 선포되던 현장의 모습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리즈 시절은 17세기 초반입니다. 그 절정기는 바로 이 블라디슬라프 4세가 역시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으면서 끝이 나버립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의회에 만장일치제도가 도입된 시기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몰락하기 시작한 때와 일치합니다. 일단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싶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의회의 만장일치제도는 엉뚱한 방향으로 폴란드의 안보를 해치게 되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그 주변에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 등 쟁쟁한 강국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런 외국 세력이 그 많은 의원 중 한 명만 제대로 매수하면 어떠한 법안도 통과가 안 되도록 마음대로 조종이 가능했습니다.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리투아니아 지역은 떠오르는 강국 러시아로부터의 침략으로부터 위태위태한 상황이었고, 폴란드와의 연합을 통해서 간신히 그 위협을 막아냈습니다.


18세기 들어서 선거로 뽑히는 왕위에 외국 세력에게 조종되는 귀족 가문들이라는 오묘한 조합이 효과를 발휘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점점 하나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갑니다. 일단 외부 강대국, 특히 러시아가 지원하는 세력이 왕으로 선출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거의 러시아의 위성국 비슷한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1622년 당시 폴란드 의회 세임(Sejm)의 모습입니다.

폴란드의 마지막 왕인 스타니슬라브 2세(Stanislaw II August, Stanislaw August Poniatowski)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젊은 시절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의 수행원으로서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 갔던 그는 당시 26살이자 3살 연상이었던 젊은 러시아의 황후 예카테리나(Yekaterina Alexeevna)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스타니슬라브는 엄청난 유부녀와 바람이 난 셈이었는데, 이 여자가 나중에 남편을 몰아내고 러시아의 여성 짜르가 된 예카테리나 대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남녀 관계에서 자유분방한 여걸로 당시 스타니슬라브 외에도 깊은 관계인 다른 남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지 2년만인 1764년, 스타니슬라브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으로 선출되도록 해줍니다.


물론 러시아가 폴란드 왕을 ‘임명’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폴란드 내의 여러 유력 인사들에게 친필 편지를 보내고, 스타니슬라브의 선거 자금으로 250만 루블을 대기도 하고, 선거를 둘러싼 폴란드-리투아니아 내부의 무력 분쟁을 이유로 의회 투표장 수km 인근까지 러시아군을 전방 배치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친러시아파로 알려진 스타니슬라브를 왕으로 선출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었습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슬라브 2세. 이분의 개혁 노력과 무능력함은 폴란드 역사에서 뒤섞인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러시아 여제의 치마폭에 싸여 왕이 되었으니 당연히 러시아에게 아양을 떨며 폴란드인을 수탈하며 지낼 것 같다고요? 천만에 말씀이었습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스타니슬라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더 강력하고 부강한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개혁에 돌입했습니다. 


개혁의 요체는 한마디로 상류 귀족들의 권력과 특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사이에서 균형 잡힌 외교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가 하는 모든 일의 발목을 잡는 암적인 존재, 의회 만장일치제도를 폐지하려 했습니다. 이런 개혁은 본질적으로는 옳은 것이었습니다만 이는 (당연하게도) 내외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현재처럼 분열되고 무기력한 존재로 남기를 원하던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는 전쟁 불사를 외치며 개혁을 반대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스타니슬라브의 개혁으로 특권과 권력을 잃은 폴란드 귀족들은 더더욱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게다가 스타니슬라브는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에서 비가톨릭신자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법안도 통과시키려 했기 때문에 더더욱 상황이 더 나빠졌습니다.

전통적인 복장의 폴란드 귀족 슐라흐타(Szlachta)입니다.

왕권이 약한 나라에서 국왕이 기세등등한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려 들면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이들은 1768년 바르(Bar)라는 곳의 요새에서 동맹 선언을 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독립성을 대외적으로,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스타니슬라브 2세로부터 지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스타니슬라브는 위에서 언급했듯 러시아군의 총구 앞에서 이루어진 투표로 왕이 된 사람이었으므로 그런 비방을 받아도 뭐 할 말이 별로 없긴 했습니다. 


이들은 국왕군과 러시아군에 맞서 전쟁을 선포했고 곧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오합지졸인 귀족 동맹군이 막강한 러시아군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었지요. 결국 이들은 약 4년간의 투쟁 끝에 분쇄되어 일부는 도주하고 일부는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참극을 맞게 됩니다. 이 와중에 대내외적으로 기반을 잃게 된 국왕 스타니슬라브 2세는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요구에 따라 영토를 할양합니다. 이것이 1772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입니다.

전투 전에 기도를 올리는 바르 동맹군. 결국 이들의 반란이 폴란드 제1차 분할을 가져오게 됩니다.

사실 이 영토 할양 자체의 기획자는 러시아가 아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 새로 떠오르던 강국 러시아가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자 러시아가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발칸 반도를 빼앗으면 역시 그 지역을 노리던 오스트리아는 동부 유럽의 힘의 균형이 깨어질까 노심초사해 내친김에 러시아에게 선전포고할 기세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두 국가와 모두 친교 관계를 가졌던 프랑스가 중재안이랍시고 오스트리아에게 ‘대신 최근에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실레지아 일부를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화들짝 놀란 것입니다. 그는 실레지아 대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이 3개국이 나눠 먹자고 제안을 합니다. 물론 원래 보상받아야 할 대상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몫이 가장 크도록 했지요.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미 러시아의 위성 국가였으니 따지고 보면 자기 땅을 남에게 갈라주는 양상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타니슬라브 2세가 노골적으로 탈 러시아적인 성향을 보였고, 또 바르 동맹 반란으로 폴란드 국내 상황도 너무 혼란스러웠으므로 러시아로서는 이런 말썽 많은 위성국가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러시아가 오스만의 땅을 빼앗으려고 시작한 전쟁에서 땅을 잃은 것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된 셈이었습니다.

얀 마테이코(Jan Matejko)의 이 그림은 1773년 폴란드 제1차 분할을 승인하는 폴란드 의회에서 분할에 반대하며 드러눕는 극적인 제스처를 취한 애국 귀족 레이탄(Tadeusz Rejtan)의 모습을 그린 유명한 그림입니다. 결국 이런 쇼에도 사실 분할 승인 외에 따로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레이탄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당시 유럽 사회는 ‘같은 기독교 국가 간에는 정의가 앞서야 한다’라는 허울 좋은 가식을 뒤집어쓰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영토 할양에 대해 국제 사회의 도움을 요청한 스타니슬라브 2세의 호소에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폴란드 분할의 당사자 3국이 분할의 명분으로 ‘무정부 상태로 빠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무능력’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핑곗거리일 뿐입니다. 비정한 국제 사회에서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지요.

제1차 폴란드 분할을 논의 중인 열강들의 모습입니다. 맨 왼쪽이 당연히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스타니슬라브 2세는 나름 폴란드를 개혁을 통해 다시 일으켜 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폴란드 귀족들과 러시아의 반대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91년 소위 5월 헌법, 즉 영국식 입헌 군주제를 표방한 헌법을 개혁파와 함께 발표하며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이 헌법은 바로 2년 전인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온 헌법에 거의 가까운 것으로 프로이센과 러시아 등 절대 왕정을 추구하던 주변 강국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이것들이 누구 코앞에서 프랑스 대혁명 흉내를 내려는 것이냐!’는 것이었지요. 특히 폴란드의 이런 개혁적이고 도전적인 성향은 주변국들이 ‘향후 폴란드가 다시 부흥하면 1772년에 분할된 옛 영토를 반환해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하게 했지요. 특히 자신들의 위성 국가 노릇을 탈피하려는 이런 노력에 대해 러시아의 분노가 매우 컸습니다.

지엘렌체 전투 이후 진격하는 코작 기병들의 모습입니다. 지엘렌체 전투에서 폴란드 국왕군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수적 열세 때문에 폴란드 국왕군은 후퇴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정작 폴란드의 이런 개혁 노력에 가장 분노한 것은 결국 또다시 폴란드의 특권 귀족층이었습니다. 이 헌법으로 권리를 침해당한 귀족은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폴란드의 개혁 헌법에 반대하는 연맹을 맺고, 1792년 5월 우크라이나의 타르고비카(Targowica)라는 작은 마을에서 헌법 반대 선포식을 가집니다. 


그로부터 4일 후 러시아의 대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경을 넘어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하지요. 스타니슬라브 2세에게 충성하는 세력은 폴란드군의 수를 10만 명까지 끌어올리는 계획을 세우지만, 돈도 사람도 없이 모든 것은 서류상의 꿈이었을 뿐, 헌법을 지키겠다고 모인 병력은 고작 3만 7,000명의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지엘렌체(Zielence) 전투에서 러시아군에게 승리를 거두는 등 몇몇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강력한 지원을 업은 타르고비카 연맹군, 즉 귀족 연맹군은 스타니슬라브 2세의 연방군에게 결국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스타니슬라브 2세는 결정적인 패배를 맞기 전에 ‘이미 수적인 열세가 너무 크다고 판단해 쓸데없는 희생을 줄인다’는 취지로 항복했습니다. 이 결정은 피 끓는 폴란드인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됩니다.

제2차 폴란드 분할 직후 벌어진 1794년 봉기에서 폴란드인이 타르고비카 연맹 지도자의 초상화(…)를 교수형에 처하는 그림입니다. 많은 폴란드인은 타르고비카 연맹을 결과적인 배신자로 여기고 원망했습니다.

스타니슬라브 2세가 너무 무대책으로 러시아에게 반기를 든 것 아니냐고요? 스타니슬라브 2세는 나름 한답시고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동맹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침공을 본 척 만 척했지요. 이미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폴란드를 또 갈라먹기로 비밀 협약을 했던 것입니다. 애초에 외국 세력을 믿고 일을 벌인 것 자체가 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요. 

프로이센 왕과 폴란드 왕 사이에 맺어진 1793년 협정서입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종잇조각일 뿐 폴란드 제2차 분할을 막지는 못했지요. 프랑스어로 쓰인 게 눈에 띄는군요.

제일 딱하게 된, 아니 쌤통이 된 것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겠다고 스타니슬라브 2세의 헌법에 맞서 싸웠던 타르고비카 연맹체의 귀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저 러시아군이 상황을 헌법 이전으로 되돌려주고 돌아가기를 기대했습니다만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 땅을 추가로 나눠 가지고 동시에 이 귀족들의 특권을 대폭 박탈했습니다. 


이때 ‘폴란드를 프로이센의 음흉한 간섭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러시아뿐이다’라며 러시아 편을 들던 일부 귀족은 ‘이제 폴란드는 끝났다 난 이제 러시아인이다’라며 변절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1793년의 제2차 폴란드 분할입니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가 참여하지 않았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여태까지 ‘그래도 옛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믿음 하나로 폴란드 전통 귀족층을 지지하던 세력들도 크게 흔들렸습니다. 무조건 옛것이 좋다고 해서 따른 결과가 이 모양이었으니 당연했지요.


이런 국민 정서는 타르고비카 전쟁에서의 항복을 승복하지 못하고 망명을 택했던 많은 폴란드 장교들로 하여금 다시 러시아와 싸워 폴란드의 자유를 되찾자는 용기를 갖게 했습니다. 특히 미국 독립 전쟁에도 참전했고, 바로 전의 타르고비카 전쟁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코시우스코(Andrzej Tadeusz Bonawentura Kosciuszko) 장군이 그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진정한 자유의 투사, 코시우스코 장군입니다. 이 양반은 소싯적에 군사 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이미 폴란드가 바르 동맹 내전을 겪으며 몰락하던 중이라 군 장교직을 얻지는 못하고 어느 부잣집에 가정교사로 취직을 합니다. 그 집 주인 딸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하려다가 잡혀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나는 봉변을 당하기도 하지요.

코시우스코는 제2차 폴란드 분할 바로 다음 해인 1794년 3월,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제2의 도시인 크라코프 (Krakow)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5가구 당 소총, 창 또는 도끼로 무장한 병사 한 명씩을 제공하도록 요구하며 동원령을 내렸는데 워낙 빈약해 풀 베는 큰 낫으로 자원병을 무장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빈약한 병력을 이끌고 라츠와비세(Raclawice)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사실 이 전투는 어찌 보면 별 의미 없는 충돌에 불과했습니다만, 이 승리의 소식은 폴란드 전역에 들불처럼 번져 폴란드 민중의 가슴을 들끓게 했습니다. 러시아군은 특히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의 반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시내 무기고를 접수하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정말 폴란드 수비대의 봉기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라츠와비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코시우스코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때가 코시우스코 인생 최고의 날이었을 겁니다.

이때도 이미 모든 힘을 잃은 스타니슬라브 2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우물쭈물하기만 해 폴란드 역사에서 결국 좋은 이름을 남길 마지막 기회를 잃고 말았지요. 봉기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Vilnius)에서도 일어나는 등 폴란드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기세를 올린 코시우스코는 ‘모든 폴란드인은 자유’라고 선포하며 농노제를 폐기하고 귀족들의 전횡을 금하는 등 개혁을 약속해 농민의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이것이 코시우스코의 폴라니에츠(Polaniec) 선언문입니다. 여기서 그는 개인의 자유와 농노 해방, 농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 등을 선언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선언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폴란드 국민이라고 할 때는 귀족만 뜻했고 폴란드 국민의 대부분이 속한 농노 계급은 제외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증강된 러시아군과 폴란드 민중의 무장봉기가 이미 분할된 기존 폴란드 영토까지 번질 것을 우려한 프로이센의 참전으로 폴란드 봉기군은 곧 수세로 밀렸습니다. 1794년 10월 벌어진 마치에요비체(Maciejowice) 전투에서 코시우스코는 패배했고, 그 자신도 부상을 입고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결국 폴란드 봉기는 실패로 끝나 1795년 10월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 사이에 맺어진 협약에 의해 제3차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지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개혁 열의는 있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무기력한 왕 스타니슬라브 2세는 러시아군의 감시 속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송되어, 사실상 감금 상태에서 예카테리나 2세가 부여한 연금을 받으며 빈곤하게 살다 1798년 뇌졸중을 일으키고 사망합니다. 이후 폴란드 민족은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120년 이상을 지내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독립합니다.

이것이 제1-3차에 걸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축소 과정입니다.

다시 1806년으로 돌아오지요. 이제 도주하는 프로이센군을 쫓아 진격하는 나폴레옹이 발을 내딛게 되는 땅은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자랑스러운 폴란드 땅이었던 곳이었고, 아직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은 폴란드인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역사와 지리에 통달한 나폴레옹은 당연히 이런 폴란드 분위기와 폴란드인이 그에게 바라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압제하던 바로 그 3개 강국, 이 세상을 나누어 지배하며 떵떵거리던 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을 차례로 꺾으며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위세를 자랑하던 나폴레옹 본인이 바르샤바를 향해 진격해오던 것입니다. 그것도 계몽사상 정신이 녹아든 나폴레옹 법전을 손에 들고 말입니다! 폴란드인에게 있어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하늘이 보내준 영웅이었을 것입니다.


폴란드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던, 세상에 다시 없는 절대 군주라고 여겨졌던 오스트리아 황제와 러시아 짜르를 한곳에 모아놓고 그야말로 박살을 내놓은 영웅 나폴레옹 본인이 역시 폴란드의 원수였던 프로이센을 두들겨 패고 그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폴란드로 온다? 이건 요즘 헐리웃 스타의 내한에 비할 바가 아닌 빅 이벤트였습니다.

빅☆이벤트

하지만 모든 폴란드인이 그렇게 순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폴란드 사회에서 독립을 꿈꾸는 이들은 크게 3개 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1. 누가 뭐래도 지정학적, 역사적인 관계를 볼 때 폴란드가 독립하려면 결국 러시아를 잘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는 친러파
  2.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이 폴란드에 나타난, 이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치면 언제 독립을 할 수 있겠느냐는 친불파
  3. 외세에 의존해 독립하겠다는 것은 독립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조차 파악 못 한 멍청이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독자파

이중 누가 옳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각파는 나름대로 타당한 합리성과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나폴레옹은 폴란드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폴란드를 러시아와 동맹을 맺기 위한 도구로 이용할 생각만 있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예전에 갈라먹었던 폴란드 땅을 토해내야 하는 것 아닌가 불안해할 오스트리아가 자신에게 반발해 다시 무기를 들지 않을까 신경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폴란드가 다시 독일의 침공 위협에 처했던 1938년 발행된 폴란드 우표입니다. 특이하게도, 맨 왼쪽에 칼을 든 코시우스코와 함께 중앙의 토머스 페인, 오른쪽의 조지 워싱턴 등 미국 초창기 인물들을 등장시켰습니다. 독일의 위협에 맞서 미국에게 뭔가 호소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런 의중을 가장 잘 파악했던 것이 1794년 크라코프 봉기의 주인공 코시우스코였습니다. 그는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감옥에 갇혔으나 예카테리나 2세의 사망 이후 파벨 1세의 사면을 받아 일단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휴양하던 코시우스코는 1798년 일단의 폴란드군이 나폴레옹 휘하에서 싸우며 특히 여동생의 아들도 나폴레옹군에 입대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되어 즉각 프랑스로 가기로 합니다. 


친구가 된 미국 대통령 제퍼슨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건너갔으나 프랑스는 나라도 없고 귀족도 아닌 일개 폴란드 망명객인 코시우스코를 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에 건너간 지 거의 1년 뒤인 1799년 말, 당시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을 간신히 만난 그는 폴란드 독립에 대한 열정과 계획을 나폴레옹에게 설명했으나, 나폴레옹은 그를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촌뜨기 망상가’로 취급했습니다.


당연히 코시우스코도 나폴레옹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죠. 그는 나폴레옹을 ‘프랑스 공화국의 장의사’라고 평하며 그의 독재적인 정치 성향을 경계했습니다. 1806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폴란드를 향해 진격하자, 코시우스코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는지 다시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보내 폴란드 의회 민주주의와 옛 영토 회복을 탄원했으나 나폴레옹은 그의 편지를 가볍게 무시했을 뿐이었습니다.


코시우스코는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을 세운 것도 어디까지나 러시아와의 흥정을 위한 것일 뿐 폴란드의 독립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새로 탄생한 바르샤바 공국으로 귀국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폐위된 이후, 그는 결국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 1세를 만나 폴란드의 독립을 호소하지만, 그에게서도 실망하고 결국 스위스로 다시 망명하고 맙니다. 그가 겪었던 처지가 당시 폴란드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폴란드 크라코프의 코시우스코 언덕. 1817년 코시우스코가 스위스에서 사망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1820년부터 3년간 폴란드 전국 모든 이의 자발적 성금과 크라코프 시민의 자발적 노동으로 쌓은 인공 언덕입니다.

이런 폴란드를 향해 이제 나폴레옹이 진격합니다. 그는 여기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과연 폴란드에서 나폴레옹을 기다리는 것은 어떤 모험이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원문: Nasica의 뜻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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