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은 기술일까?

조회수 2018. 2. 19. 16: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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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을 끼워 팔면, 무조건 팔리는 세상?

어떤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게 된다면, 가장 먼저 쓰이는 내용이 바로 시의성에 관한 부분들이다. 가령 그 주제가 왜 지금 우리에게, 혹은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금 한창 그것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통계, 기사, 인터뷰, 설문 등)들을 첨가하여 독자의 관심을 끌어 온다. 그런 사전 작업이 마무리된 후에야 비로소 본론이 시작된다.


하지만 창의성(Creativity)을 주제로 글을 쓰려한다면, 딱히 그러한 거추장스러운 과정들이 필요치 않은 듯하여 편하다. 창의성 중요한 것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고, 창의성에 관심 가지지 않는 사람 아무도 없지 않은가.

와~ 창의성이다(?)

창의성은 자본주의 시대의 훌륭한 지적 상품이다. 어떤 형태로든, 그럴싸하게 창의성이라는 키워드를 품는다면 그 상품은 팔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창의성을 주제로 상품을 기획하고 홍보하는 것은 마케팅 분야의 기본 테크닉 중 테크닉이 된 것 같다.


창의성 향상에 도움을 주는 각종 식품, 공산품, 서비스, 거주환경 등등 잘 찾아보면 창의성을 접목시킨 상품들이 주위에 가득하다. 그리고 역시나, 창의성을 파는 데 앞장서고 있는 분야는 단연 교육이다. 아동 교육, 청소년 교육, 성인 교육 할 것 없이 교육 시장의 상당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창의성이다.


나 또한 창의성을 주제로 한 강연을 많이 들어 봤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책 또한 많이 읽어 봤다. 하지만 창의성이 정녕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역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하다. 때로는 ‘창의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가 창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도 궁금해 다시 생각해본다.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놀랄 법하면서도 생산성이 있는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괴물(?) 같은 사람들을 종종 보노라면 그런 궁금증이 한층 더 강해진다. 비결이 뭘까. 노하우가 뭘까. 그들은 창의성을 뭘로 정의하고 있을까?


창의성은 기술(Skill)이다. 창의성에 대한 공부를 처음 하며 들었던 생각이다. 왜냐하면 창의성을 가르치는 내용들을 들어보니 자꾸 뭔가를 부수고 깨뜨리고 조각낸 후, 그것을 다른 조합으로 짜 맞춰 보라는 ‘기술적 요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는 두 단어를 억지로 조합시키고 그 안에서 스토리를 짜내는 것. 그게 바로 내가 눈여겨본 최초의 창의성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럴듯한 비유가 같이 떠올랐다. 어쩌면 창의성이란 수학책에 등장하는 순열(Permutation), 조합(Combination)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창의성 = 엔피알, 혹은 엔씨알


먼저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온갖 단어들을 테이블에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단어들을 (순서 상관없이/고려하여) 늘어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모두 적는다. 단어들의 조합이 말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야말로 창의적인 발상을 가로막는 적이라 규정된다.


일단 무조건 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풀어놓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게 하면 뭔가 어설픈 듯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이 몇 가지 만들어진다. 그 광경을 보노라면 때로 놀라움과 함께 탄성이 나온다. 아, 이거구나. 이것이 바로 창의성(Creativity)의 탄생인 것이다. 어쨌든 지금 보고 있는 이 가능성은 분명 전에 못 보던 것이니.

그 이후에도 나는 창의성에 대한 다양한 선생님들을 만났다. 물론 그들 각각이 지닌 맥락은 달랐다. 누군가는 역설, 반어, 비유, 도치 등 문학적 장치들을 활용하면 새로운 생각들의 연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다.


혹 다른 누군가는 자연과학과 IT, 인문학을 어지럽게 결합시켜 새로운 발상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창의성 만들기의 본질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창의성은 기술이다. 결국 어떤 재료를 쓰느냐의 차이일 뿐, 창의성을 만드는 메커니즘은 결국 순열, 아니면 조합 문제 풀이와 유사하다.


몇 년 전에는 그런 내 생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재미있는 표현을 한 가지 만나 감격하기도 했다. 같은 대학원의 대선배이신 그분께서는 그것을 가리켜 이렇게 부르고 계셨다.

 

언제부터인가 회의를 품게 됐다. 순열과 조합에 의한 접근법. 그건 틀림없는 진짜였다. 창의성은 대개 그렇게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가 생각하는, 어쩌면 모두가 기대하는 창의성이 완성되지 않는 듯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았다. ‘기술은 물꼬를 튼다. 그러나 영혼을 불어넣지는 못한다.’ 새로운 것 그 자체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래서 창의성을 가르치려는 이들이 너도나도 주장하는 것이다.


획기적인 발상법,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창의력 훈련 등등. 그러나 진짜 난관은 거기가 아니다. 바로 그다음이다. 새로운 연합을 만들어냈을 때, 그 틈새에 스토리를 짜 넣는 일은 어떻게, 누가 하는가? 스토리를 짜 넣는 것도 모자라 그것이 ‘돈이 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창의성은 기초체력이다


내가 생각한 두 번째 창의성의 정의였다. 새로운 발상에 스토리를 부여하고, 상징성을 부여하고, 생산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다양한 배경 지식, 그리고 그 토대를 가능케 했던 개방성(Openness)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창의성을 위해서는 평소 오감을 통해 습관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정보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뻔한 것, 익숙한 것보다는 기왕이면 새로운 것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머릿속을 계속 헝클어뜨리는 습관이야말로 창의적 인간의 토대를 만든다.


물론 이 개방성 자체가 직접적으로 창의적인 결과물을 담보하진 않는다. 새로운 것들을 접한다 해서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결과물이 손에 떨어지진 않는다는 의미다.


그보다는 창의적 기술(Skill)로 인한 결과물에 통찰력을 부여하는 데 필요한 ‘기초체력’이 알게 모르게 쌓여간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소위 말해 경험치를 먹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구매해 읽기로 결심했다고 하자. 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고 단지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정도면 될 것이다. 단, 가진 돈은 만 얼마 남짓이라, 마음껏 고를 수는 없다. 이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떤 책을 구매하겠는가?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많은 책들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전한’ 선택을 한다. 베스트셀러나 추천 도서를 집어 드는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읽어본 책이니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는 보장되리라(적어도 ‘실패’하지는 않으리라는 예방 초점(prevention focus)적 계산이 여기에는 깔려 있다).


그러나 베스트셀러를 집어 드는 선택은 적어도 창의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다소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그 안전함을 선택한 대가로 우리는 창의성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기초체력’을 배양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다.


누구나 다 보는 책을 가지고 머리를 굴려본들, 남들 보기에 ‘새롭다’는 평을 들을만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개인차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받아들인 재료가 동일할진대, 과연 얼마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나 스스로에게야 베스트셀러조차 신선한 발상이 될 수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런 평가를 받으려면 애초에 보고 듣고,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같지 않아야 한다.


이는 다른 소비의 맥락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듣는, 순위 차트 상위권에 있는 음악을 들을 것인가, 웬만한 사람들은 접해보지 못했을, 신인 가수의 앨범을 들어보느냐. 혹은 밥을 먹을 때 역시 마찬가지다 늘 먹던 것을 먹느냐, 과감히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느냐.


정리하자면 무명작가의 첫 책을 고르는 것, 인터넷 아무리 뒤져봐도 후기글 없는 식당에 들어가는 것, 신인 가수의 데뷔 앨범을 사서 들어보는 것은 일견 ‘안전한’ 선택은 아니다. 돈만 날렸다며 실패를 예감하고 아까워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전에 접해본 적 없는 그런 신선한 자극들이 당신의 굳어 있는 머리를 헝클어줄 가능성은 높다. 당장의 그 자극으로 말미암아 새롭고 생산적인 아이디어가 단번에 떠오르지는 못해도, 간접적으로 창의성을 위한 기초체력 단련이 된다는 점에서는 이롭다.


생각의 범위를 넓혀볼 수도 있다. 이건 정말 가설에 불과한 것이지만, 고민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어 언급해보고자 한다. 바로 경제적 상황과 한 사회가 보유한 창의성의 총량에 관한 것이다. 불경기 상황을 가정해보자.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비교적 잘 버티지만, 나머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임금은 물가상승분을 따라가지 못하고, 동결되거나 삭감되기 쉽다.


자연스럽게 당신의 지갑은 얇아져 간다. 엥겔계수는 높아지고 책을 사거나 음악을 듣거나 공연을 보러 가는 등의 행동은 사치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단지 먹고사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 수는 없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방편으로, 문화생활을 가끔씩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결심이 선다. 그런데 고민이 앞선다. 무슨 책/영화/공연/음악을 선택할까? 돈도 별로 없으니 ‘실패’하면 안 되는데. 그냥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을 선택해야지 뭐.


경제적 궁핍은 사람들의 마음마저 가난하게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고 안전한 것, 검증된 것을 더 찾게 만든다. 사람들이 찾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다 보니 결국 생각해내는 것 또한 거기서 거기가 된다. 그 결과,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창의성의 총량은 점차 줄어들어 갈 것이다.


한편 사람들이 신인 작가, 신인 가수, 신인 예술가, 신인 요리사, 신인 감독 등에게 돈을 쓰지 않으니 그들의 사정은 더더욱 궁핍해져 간다. 끝끝내 이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만의 창조적 예술 철학을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비교적 잘 팔릴 만한’ 방향으로 창작물의 목표지향을 바꿔 버린다.


이렇게 촉발된 다양성의 감소는 결국 소비자들이 가질 수 있는, 선택 가능한 범위 자체를 줄여버릴 것이다. 새로운 것, 안 접해 본 것에 투자하려 해도 공급자들이 이미 모두 짐을 싸버린지라 결과적으로는 예전에 하던 대로, 베스트셀러나 집어 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주입식 교육은 비단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큐레이션(Curation)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술로서의 창의성을 강조할 것인가, 기초체력으로서의 창의성을 강조할 것인가? 나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심리학자들은 단지 새롭다는 특징만으로는 창의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새로우면서도, 개인/사회에 가치로운 것이어야 창의적인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새로움’만을 추구할 것이었다면 창의성을 일종의 기술로만 받아들여도 충분하다. 생각의 파편들을 긁어모아 순열/조합으로 짜 맞추면 된다. 그러나 거기에 가치, 생산성, 스토리 등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무언가는 다름 아닌, 창의성의 기초체력 향상을 위한 습관으로부터 나온다.

 


창의성은 습관이다


창의성은 단발성 기술이 아니다. 장기간의 경험으로 배어 나오는 습관이다. 창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창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창의적인 사람들은 계속해서 창의적이다. 그들은 창의성에 대해 뭔가 깨달은 듯,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그들이 곧 창의성을 습관으로 내재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같은 시간, 같은 비용, 같은 노력이 들어간다면 기왕이면 안 해본 것, 아직 못 겪어 본 것,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것에 ‘굳이’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다.


여기, 누구나 놀랄 정도의 훌륭한 발상을 지닌 광고가 한 편 있다고 해 보자. 그 광고를 통해, 우리는 창의성에 관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만약 그 광고에서 시도되었던 발상, 기법, 구도 등을 따라 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그건 단지 창의성의 기술적인 측면만을 본 것이다.


이 경우, 기술 그 자체는 가져올 수 있어도 그 기술 사이사이에 녹아들어 있는 창작자의 내공만큼은 결코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표절 논란에나 휘말리지 않는다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에 바람직한 방법은, 훌륭한 광고를 한 편 만나거든 그것을 우선 200% 즐기는 것이다. 그 놀라운 발상에 충분히 감탄하고 빠져들 수 있어야 한다. 뒷짐 풀고 손뼉 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서는 단지 그 놀라운 경험을 가슴속에 담아두면 된다. 그러한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며 창의성의 기초체력을 다져 가면 그것으로 족하다.

기억하자. 창의적인 어떤 것을 봤는가? 지금 그 발상을 따라 하면 표절이 된다. 너도 나도 따라 할 수 있는 그 순간에 행동에 옮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맥락이 바뀌었을 때,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따라 할 사람이 거의 없을 때, 그때 꺼내면 그 발상은 창의성이 되고 혁신이 된다. 물론 그 ‘꺼내어야 할 때’를 알아보는 능력은 당신의 그간 단련해 온 내공에 달려 있으리라.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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