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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스물둘 박종철, 남영동에서 지다

조회수 2018. 1. 17. 19: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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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0년이 흘렀다.
출처: ⓒ KBS화면 갈무리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된 박종철은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졌다.

1987년 1월 박종철, 남영동에서 고문으로 지다


1987년 1월 14일 오전 11시 20분께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서울대 인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22)이 심문을 받던 중 고문으로 숨졌다. 1월 13일 자정께 하숙집에서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된 채 12시간이 되지 않은 때였다.


경찰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 중이었던 선배 박종운(26, 사회학과 4년 제적)을 붙잡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하였으나 박종철은 박종운의 소재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경찰은 심한 폭행과 함께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을 가했고, 박종철은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검안의는 사인을 ‘미상’으로만 기록했다


당황한 경찰은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로 가서 거기서 일하고 있던 내과의 오연상(30)에게 긴급 왕진을 요청했다. 형사들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대학생 한 명이 술을 많이 먹었는지 목이 탄다며 물을 달라고 해 주전자째 마시더니 호흡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형사들을 따라간 오연상이 509호실의 문을 연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반대편의 하얀색 욕조와 바닥에 흥건한 물’이었다. ‘오른쪽 낮은 평상에 속옷만 입은 채 누워 있는 대학생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다.’ (관련 기사 : 박종철 고문 첫 폭로 의사 “23살 학생이 무슨 짓 했다고…”)


형사들의 설명이 사실이 아니라고 직감한 오연상은 이미 숨진 박종철을 상대로 30분간 심폐소생술을 했고, 그 뒤 형사들은 숨진 박종철을 경찰병원으로 이송했다. 사망진단서를 요구하는 경찰에게 그는 “원인을 모르겠다. 사인은 전부 미상으로 쓰겠다.”며 그렇게 써 주었다.


사인이 ‘미상’으로 된 이 진단서에 꽂힌 중앙일보 기자 신성호가 이 사실을 다음날 단신으로 보도하면서 사건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공안당국은 어쨌든 이 사실을 발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공식 발표는 오히려 의혹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 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박종철이 숨졌던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서울대 동기회 조기와 박종철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 어이없는 발표 때문에 한동안 ‘탁 치니 억’은 군사정권의 궤변과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경찰은 사건을 묻기 위하여 시신을 화장하려 했으나 부장검사 최환은 사체를 보존하고 부검할 것을 지시했다. 부검은 검사 안상수의 지휘로 1월 15일 오후 늦게 실시되었다.


부검을 맡은 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와 한양대 박동호 교수였다. 부검결과, 박종철은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출혈의 흔적이 있었다. 사타구니와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의 결과로 사인이 전기고문과 물고문인 것은 분명해졌다.

진상을 폭로한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

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보고서를 작성했고, 1년 뒤에는 부검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기록한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구속되었다.


경찰의 사건 조작과 은폐에도 불구하고 최초 검안의 오연상과 부검의 황적준의 증언이 잇달아 신문 지상에 실리면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심증이 굳어지자 경찰은 자체조사에 나서, 1월 19일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조한경과 강진규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1월 29일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경찰의 2차 수사결과 발표도 사건의 진상을 은폐 조작하는 것이었다. 경찰은 부검결과 사망원인은 물고문이 아니라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라고 강변하면서 정확한 사인규명을 외면했다. 사인규명은 검찰에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찰은 시신을 부검한 후 서둘러 화장함으로써 증거인멸을 꾀했고 언론에는 보도지침을 내려 축소 보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야당과 종교단체가 들고 일어나면서 진상규명 요구와 정권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국민의 목소리도 드높아졌다.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진상이 드러나다


재야 종교단체들의 규탄성명과 진상규명 요구 농성에 이어, 각계 인사 9천여 명으로 구성된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추도회와 49재 등을 치르며 고문 정권을 규탄하고 민주화 투쟁을 이어갔다.


당시 고문 경관이 수감되어 있었던 영등포구치소 보안계장은 고문에 관여한 경찰관 3명이 더 있고 경찰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그는 마침 같은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 전 의장은 이 사실을 밝히는 쪽지를 한 교도관을 통해 외부로 전달할 수 있었다.


수습되는 듯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진상폭로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사제단은 이부영 메모를 근거로 고문치사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었다.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 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사건 이후 부친이 박종철을 보내며 했다는 말을 쓴 펼침막을 들고 대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1987년 1월, 박종철의 영정을 들고 서울대 학생들이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폭로로 서울지검은 6명을 추가 구속하였고, 정부는 주요 인사에 대한 문책 인사를 단행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검경의 사건 은폐 조작 시도는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었다. 전두환의 호헌선언에 이어진 국민의 저항은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집권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는 ‘직선제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 항의 시국수습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6·29선언’으로 국민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가 당선됨으로써 박종철과 이한열의 희생으로 거둔 민주화 투쟁의 승리는 물거품이 되었다.



후일담들… 그러나 ‘지금 박종철만 없다’


최근 영화 <1987>은 비록 일부 허구가 덧입히긴 했지만 30년 전의 민주화 투쟁의 전모를 극화하고 있다. 1987년을 겪지 못한 이들도 영화를 통해 그 시절의 역사를 추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30년이 흘렀다. 당시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던 이들에 대한 후일담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최초로 사건을 기사화했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는 현재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다. 그러나 역사를 바꾸는 특종을 썼던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특보를 지낸 사실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관련 기사 : 박종철 사망 특종한 기자, 왜 박근혜 홍보 특보를?)


당시 박종철이 죽음으로 지켰던 선배 박종운은 이후 한나라당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세 차례나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최근 JTBC의 ‘썰전’에서 그의 거취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개인의 정치적 선택은 존중받아야 하겠지만 그가 한나라당으로 간 데 대해 박종철의 유가족들이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어느 보수 온라인언론의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 <1987>(감독 장준환)은 1987년의 역사를 복기하고 있다. 영화 포스터.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한 미화 논란도 화제가 되었다. 1987년의 역사는 부검을 결정한 검사, 경찰의 은폐 조작을 제보한 교도관 등의 결단으로 이루어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을 일방적으로 의인으로 볼 수만은 없는 것은 그들도 폭압적 정권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군사독재정권의 주구, 하수인, 사냥개 소리를 듣던 가해 집단이었다.

그러나 당사자들, 특히 경찰의 진상 왜곡을 폭로한 두 교도관은 역사의 증인이었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2012. 1. 14.)에 나타난 두 교도관은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데 이바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가해집단’이라며 머리를 숙였던 것이다. 거기엔 인간과 역사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게 되는 감동이 있다. (관련 기사 : 25년 만에 얼굴 드러낸 박종철 사건 폭로 주역들)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 신창언은 이후 민자당(자유한국당의 전신)의 추천으로 헌법재판관을 지냈고, 담당 검사였던 박상옥은 2015년 박근혜 정권에서 대법관 후보로 지명되었다. 당시 박상옥은 사건이 축소, 은폐된 사실을 알고도 수사를 확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을 빚었지만, 새누리당 덕분에 인준 과정을 통과했다.


수사 당시 사건 은폐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던 담당 검사 안상수는 한나라당 당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창원시장이다. 삶의 부침이야 없지 않았겠지만, 1987년의 역사를 안고서도 모두가 제 나름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아들이 죽은 후 민주화 투사가 되었던 박종철의 부친 박정기 씨는 지난해 1월 촛불집회에도 참석하였다.

다만 스물두 살 나이에 진 박종철만이 지금 여기에 없다. “종철아, 잘 가거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도 없대이…….”라고 애끊는 부정을 드러냈던 부친 박정기(90) 씨는 아들을 그렇게 보내고 투사가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부산경찰청장이 병원에 입원 중인 그를 찾아 과거 경찰의 고문 행위에 대해 사죄했다고 한다. 그게 역사인 것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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