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성찰을 잘하는 사람이 연애도 잘한다

조회수 2017. 11. 1. 2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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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관대하고 공정한 만큼 상대에게도

『내가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라는, 내가 인문학을 해서 연애를 못 한다는 건지 인문학을 안 해서 연애를 못 한다는 건지 헷갈리는 묘한 제목의 책을 낸 이후 종종 연애강연을 했다.


그래도 명색이 ‘연애인문학’ 저자인데 보통의 연애강연을 할 순 없고 ‘기술’과 ‘심리’에 집중된 우리의 관심을 사랑에 대한 저마다의 사유로 돌리자는 얘길 주로 한다. 그러나 뒤풀이에 가면 역시 기술과 심리를 중심으로 연애상담을 하게 된다…

내 상담이 큰 도움 될까 싶지만 원하니 해드림. (…)

그날 밤의 호프집에서도 열심히 청중들의 연애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20대 초중반이 주축이 된 강의여서 그런지 상담 주제의 대다수가 ‘나는 왜 연애를 못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왜 연애를 못 하는가?

언론은 n포세대 운운하며 ‘삶이 고달파 연애도 못 하는 청년들’ 이미지를 널리 퍼뜨렸다. 거기에도 물론 일말의 진실은 있다. 하지만 사회현상으로서 청년세대가 연애를 못 하는 것과 개별 청년이 자기 삶의 맥락 속에서 연애를 못 하는 건 다른 문제여서 실제로 사람을 앉혀다 놓고 얘기를 들어보면 훨씬 복잡하고 복합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연애를 못 해 고민이라는 이들의 대다수는 사실 20대 초반이다. 이들은 ‘성인의 연애(중고교 시절의 연애와는 다른)’가 낯설어서, 혹은 연애를 포함한 관계 전반의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아 연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지, 새로운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들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하는지, 갈등은 어떻게 조율해나가야 하는지, 이들은 서툴다. 이런 연유로 연애를 못 하는 이들은 수적으로 다수여서 ‘세대 공통의 문제’처럼 보이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사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줄어들 집단이다.


이런 ‘관계에 서툰 상태’가 20대 초반을 지나서도 오래 지속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고 이런 이들이 늘어났다는 것이 사회현상이라면 현상일 텐데, 그 원인 역시 ‘청년의 고달픈 현실’로만 수렴하지 않는다. 88만 원이라는 평균급여로 상징되는 청년세대가 마주한 빈곤이나 경쟁체제 속에서 줄어든 심리적 여유는 물론 관계에 있어 문제다.


지인과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니 댓글 창이 지저분해진다는 얘길 한 적이 있다. 상대의 주장에 대한 호의적인 독해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막아줄 깊은 사고가 가능하려면 어쨌거나 그럴 여력이 있어야 하고, 그 여력이란 경제 상황에 상당히 연동돼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연애를 비롯한 관계의 문제 또한 ‘타인을 받아줄 여력’과 연관이 깊고, 빈곤한 상태나 경쟁체제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와 함께 나는 더 큰 변동이 있었고 이게 더 근본적이라 본다. 바로 ‘소비자적 합리성’의 강화다.



소비자적 합리성의 강화와 연애 못 하는 세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후기 근대에 이르러 소비자본주의로의 이행과 함께 사람들의 합리성 또한 변동을 겪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초기 핵심문제가 ‘어떻게 더 생산할 것인가’였다면 생산력이 전 세계 인구를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로 증대된 요즘 기업들의 고민은 ‘어떻게 더 소비하게 할 것인가’다. 생산은 부차적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

이제 자본에게 관건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대체로 갖춘 사람이 계속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유행이 생겨나 아직 쓸만한 것을 낡은 것, 뒤처진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너만의 특별함을 표현하라’는 구호에 둘러싸인다. 점차 개인성을 중시하고, 빠르게 변화하고, 한 가지에 오래 묶여 있기를 거부하는 소비의 미학이 후기 근대사회의 핵심원리로 자리 잡는다. 


소비자적 합리성이란 소비를 할 때 준거가 되는 합리성(예컨대 여러 상품 가운데 ‘가성비’ 좋은 상품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비의 미학이 사회 전반을 물들이며 관계와 같은 소비와는 다른 합리성을 필요로 하는 삶의 영역들까지 소비자적 합리성이 지배하며 문제가 생긴다.


관계의 미학은 정확히 소비의 미학의 반대다. 연애란 기본적으로 한 사람에게 묶이는 약속이며, 변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며, 강고한 개인성 일부를 포기하는 일이지 않던가. 당장 배송되고 간편하며 환불이 보증되어 있으면서 질리면 갈아치워도 되는 상품을 선호하는 ‘소비자적인 마인드’로는 사랑에 이르는 것도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바우만은 짧아지는 연애주기와 인스턴트식 만남의 증가, 썸만 타는 등 헌신하지 않는 경향처럼 현대인이 겪고 있는 관계의 여러 문제를 소비자적 합리성의 지배로 설명한다. 이는 한국의 상황과 관련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현재 20대 초중반이 지나서도 연애를 못 하겠다는 젊은 세대는 한국 사회가 본격적인 소비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든 이후 나고 자란 첫 세대다.


연애 못 하는 청년의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치환되지 않음을 이야기하다 글이 길어졌다. 요컨대 현재 청년 문제의 초점은 넓게는 IMF 이후 2000년대, 좁게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악화된 경제 상황에 맞춰져 있지만 바우만이 지적한 관계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이며, 갑자기 한국이 7%대의 고성장을 거듭하며 청년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진다고 해도 여전히 남아 있을 문제라는 것이다.

2000년대 연애 담론과 삼포 세대, 바우만의 논의의 더 자세한 설명은 『내가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 1장을 참고…☆

다시 돌아와서, 연애를 오래 못해 고민이라는 두 사람 


어쨌거나 그날 만난 연애를 못 해 고민이라는 이들 가운데 유독 기억에 남는 사람이 둘 있었다. 둘 다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일단 연애에 돌입하는 것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아리따운 처자들인지라 썸은 자주 있었다. 그러나 막상 사귀고 나면 관계가 오래가질 않는 것이었다. 일주일 만에 헤어진 경우도 있었고, 가장 오래 사귀어 본 건 100일 정도가 다라고 했다.


바우만의 논의를 적용해 세대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개별사례에 집중하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100일이면 그래도 가장 오래 사귄 건데 왜 헤어졌냐’는 물음에 둘 중 하나가 한 대답이었다. ‘자신도 잘못하긴 했지만 그 사람이 좀 이상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정말 이상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누구든 100일 정도 사귀고 헤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십중팔구 기억 속에 이상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100일이란 그런 기간이기 때문이다.

출처: maniadb
구남친은 원래 찌질한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괜히 이런 앨범이 나오는 게 아니다.

사귄 지 100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대체로 3단계를 거친다. 

  1. 탐사와 감사의 시간이다.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쉴 땐 뭘 하는지 적극적인 탐사에 나서는 동시에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다니 모든 것이 그저 기쁘고 감사하다. 콩깍지의 시간이기도 하다.
  2. 접어들면 서서히 갈등이 시작된다. 행복한 일치의 환상이 깨어지고 이것저것 맞지 않는 부분이 드러난다.
  3. 2단계가 발전하여 갈등이 극대화되는 단계다. 갈등의 골로 치닫는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의 ‘이상한’ 모습을 본다. 특별히 예민하게 구는 문제, 유달리 참지 못하는 말, 동의 안 되는 갈등 해결 방식 등.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우리로서는 당연히 그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이상함은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이다. 확인한 게 그 정도일 뿐 실체는 더 이상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수면 위로 떠 오른 부분만 보아서는 그 아래 가라앉은 부분을 짐작하기 어려운 빙산처럼 아직 상대에 관해 아는 정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나의 절친이나 형제가 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참을성이 많지 않은 존재이므로 역시 이상하다고는 느낄 것이나 전혀 이해할 수 없지는 않을 것이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 대해서는 그 이상함을 해석하고 참작할 다른 단서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00일 만에 헤어지면 누구나 이상하다


연애의 과정은 전혀 알지 못했던 타인의 상처와 고통, 역사와 세계를 이해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몇몇 좋은 순간을 함께 했을 뿐 서로의 내밀한 영역을 나눈 적 없는 100일 정도의 관계에서 상대의 어떤 특성은 그 역사와 맥락이 소거되어 있기에 도드라져 보이고 이상함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 부분만 딱 떼서 전시해 놓았을 때 이상한 부분이라면 나 역시도 가지고 있다. 흘깃 보았을 때 우리는 대체로 좋은 사람이지만 살짝 들어가면 다들 각자의 기벽을 가진 이상한 사람이고, 아주 깊이 들어가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많은 연인이 100일의 고비를 넘기며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관계의 역사란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에 갑자기 확 깊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아직은 서로를 잘 모르며, 그렇기에 노력해야 함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이르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


100일은 객관적인 기간이 아니라 은유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달떴던 연인이 서로의 다름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갈등과 대면하기까지의 시간에 대한. 100일 정도 사귀고 보니 좀 이상한 사람이구나 싶어 헤어졌다는 그 처자는 이 최초의 갈등을 한 번도 넘어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갈등의 산

연애를 잘 한다는 것


그러므로 연애를 잘 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보통 우리는 두 가지 뜻으로 쓴다. 우선 연애에 돌입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매력 자본 운용과 관련이 깊다. 자신을 매력적으로 드러낼 줄 알고 이성의 호감을 잘 끌어내는 이들이 연애를 ‘잘’한다. 픽업 아티스트나 통상의 연애강연이 연애를 잘하게 해주겠다며 가르쳐주는 게 이런 자기 연출과 이성공략의 기술 및 심리다.

그러나 그 기술과 심리가 유효한 것은 관계에 돌입하는 데까지다. 이런 식의 ‘잘’함은 관계가 시작된 이후에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렇게 연애에 잘 돌입하는 이들은 이후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대체할 관계를 언제든 만들 수 있으니 상대를 선택하는 데 신중하지도 않고, 그렇게 선택했으니 막상 선택한 관계에 집중도 잘 안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관계를 잘 유지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우리는 4~5년을 사귀었다지만 그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7~8번쯤 반복해 볼 때마다 조심스럽게 요즘은 잘 사귀는지 물어봐야 하는 사람에게 ‘연애 잘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오래 사귀었지만 둘 중 하나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연인도 마찬가지다.


‘관계를 잘 유지한다’는 말은 단순 지속뿐 아니라 관계를 질적으로 발전시킬 줄 알고 계속 가꾸어나갈 줄 안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까닭이다.



관계는 원래 잘 유지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관계는 잘 유지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서로 다른 두 인간이 만나는 순간 갈등은 잉태된다(아니라면 둘 중 하나가 맞춰주고 있거나, 상대에게 별 기대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매우 다른데, 다른 가운데 자기중심적이라 상대를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그래서 보통은 이해하지 않고 대충 넘어간다.

너는 그러니? 나는 다른데. 그래도 상관 없지 뭐.
너는 너, 나는 나 아닌가. 평소엔 달라도 괜찮다.

그것이 상관있어지는 순간이 도래한다는 게 문제다. 나는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고 그는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데까지는 문제가 없다가 당장 오늘 저녁 둘 중 무엇을 볼지 결정해야 한다든가,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고 그는 고양이를 싫어하는 데까지는 역시 별문제 없다가 다음 달부터 같이 살게 되어 내가 키우던 고양이는 어떻게 할지 결판을 봐야 한다든가, 이거 내 얘기 아닌데 여하튼 관계는 본질적으로 갈등의 연속이다. 어찌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방법 없다. 내가 포기하거나 상대가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때문에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연애를 오래 하지 못한다. 그들은 굳이 자신이 포기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며 그런 상황에 거듭해서 놓이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100일 만에 헤어지는 사람이 관계 자체에 경험이 적고 미숙해서 그런 거라면 이들은 초기의 갈등은 넘기지만 이런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고 1년 정도 사귀고 곧잘 헤어지는 경향이 있다.


어느 정도의 자기애는 누구에게나 있어 포기가 달가운 사람은 없다. 두 번째 의미로 연애를 잘하기 위해서는 기술이나 심리 수준이 아니라 ‘자기 수양’이 요구된다.


갈등의 순간 상대는 언제나 부당해 보인다. 상대에게 서운하기에 그 부당함은 더 커 보인다. 그러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대다수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없는 문제들이다. 자주 가는 커뮤니티 들고 가서 내가 옳냐 상대가 옳냐 물어봐야 소용 없단 얘기다. 최근 이혼을 결심한 어떤 이의 글에서 이혼을 선언한다면 그건 언제나 자신일 거라 생각했는데 남편 역시 관계 속에서 나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가 쌓여 왔음을 깨닫고 놀랐다는 대목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우리는 다른 한편 대동소이하다. 내가 서운하고 화가 날 때는 상대 역시 그러하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건 상대 역시 나처럼 서운하고 먼저 마음을 열어주기만 기다릴 것을 짐작하고 상대의 주장과 맥락을 가능한 한 공정하게 읽어주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가장 호의적인 독해자가 되어 그 자신조차 빠져있는 줄 몰랐던 조각을 찾아주자.



자기성찰을 잘하는 사람들이 연애를 잘한다


끝없이 자기를 성찰하고 제한하는 것이 관계 유지의 핵심이다. 말로는 간단한 게 막상 서운하고 화났을 때는 전혀 간단하지 않다. 괜히 수양이 아니다. 돌아서서 후회할 상처 주지 않고, 서운하고 화난 가운데서도 나에게 관대하고 공정한 만큼 상대에게 관대하고 공정한 것. 그게 성찰로부터 온다고 믿고, 이렇게 스스로를 성찰하여 제한할 때만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두 종류의 연애 잘 하는 사람 가운데 전자(연애에 잘 돌입하는 사람)라고 반드시 후자(관계를 잘 유지하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내게 상담을 요청했던 두 사람도 연애에 돌입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관계를 지속시키지는 못했다. 반면 후자는 대부분 전자이기도 한 경우가 많다. 관계를 잘 유지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제대로 상호 소통하는 법을 알며 상대의 실수나 단점에도 관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남녀노소 매력적이다.

물론 원빈도 남녀노소 매력적이다.

시대가 바뀌고 강산이 변해도 연애를 잘 하기 위해 필요한 건 기술이나 심리가 아니라 성찰과 수양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은 타인임을 언제나 새기며 자신에게 성찰적이어야 한다. 


원문: 심야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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