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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모친 훈육 신화의 진실

조회수 2017. 6. 26. 2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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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석봉의 인생은 찌질함 그 자체였다.
출처: 조선일보
아이들에게 책 읽는 습관만 들이면 나중에는 알아서 독서를 하게 된다고들 한다. 틀린 말이다. 책을 읽는 건 ‘습관’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매를 잡으시라. 세 시간 동안 아이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은 고역이다. 부모님들도 그 시간 동안 뭐든 하시라. 뭐가 돼도 된다. 한석봉 어머니가 떡 썰기의 달인이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아이 독서 지도, 스파르타式으로!’ <조선일보>

지랄이 가히 풍년이로다. 기자는 한석봉(한호/韓濩, 1543~1605)의 어머니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강제적으로 습관을 들였기에 한석봉이 명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지랄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사실 한석봉의 인생은 찌질함 그 자체였다.

그는 선조 대에 사자관(寫字官) 자리에 평생 머물렀던 인물인데, 사자관이라는 직책은 승문원과 규장각의 하급 관리직을 의미한다.


사자관의 주요 업무는 사대교린문서(事大交隣文書)와 자문(咨文)·어첩(御牒)·어제(御製)·어람(御覽) 등의 문서를 대필하여 정리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루종일 주구장창 키보드 앞에 앉아서 워드만 쳐대는 일이라고 보면 된다.


조선 초기에는 이러한 직책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 다만 경력이 높고 지식수준이 탁월한 문신들 중에서 글씨가 빼어난 자에게 사대문서 및 부본 등을 함께 집필하거나 혹은 대필하도록 하였으나, 조선 중기부터는 이러한 직책이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규장각 소속 사자관은 8명, 그리고 승문원 소속은 40명. 당근 승문원 소속이 낮은 직급이었고, 석봉 한호 역시 승문원 소속이었다.


사자관이 되기 위한 조건은 조선의 과거 시험에서 실제로 관리직를 뽑는 대과가 아닌, 소과(혹은 사마시/司馬試) 중 진사시에 합격된 진사들 중, 글씨를 깨끗하게 잘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유일한 조건이었다.


조선시대의 사마시는 고려시대의 국자감시와 승보시를 계승한 것인데, 진사시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계승한 것이다. 시험은 시(詩)·부(賦)·표(表)·전(箋)·책문(策問)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두 번의 시험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어 초급 문관에 임명될 수 있었다.


물론, 승급시험 등에 도전하기위한 중급 관리 등용시험(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 또한 있었다.


단, 석봉은 이 진사시에 턱걸이로 합격하였고, 대과에 여러 번 도전은 해봤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으며, 지식 수준은 밑바닥을 돌았고 오로지 글씨만 잘 썼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무척 찌질한 인물이었다.


그의 글씨가 너무 미려하여 선조가 그에게 종육품 와서별재(瓦署別提)에 봉하는데, 와서(瓦署)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공조 산하의 관청으로, 궁궐이 “기와”를 보수하는 관청을 의미한다. 와서의 별제라고 하면… 뭐 일반 기업의 직급으로 비교하자면, “대리 을” 정도라고 보면 된다.


사실 선조는 그에게 더 후한 직책을 내리려 하였지만, 대관에 급제하지도 못한 이를 중책에 중용할 수 없다고 조정 대신들의 반발에 부딪혀 겨우 종육품 별제직을 준 것이다.


그리고 그가 와서 별제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늘날의 감사원에 해당하는 사헌부에서 이런 상소가 올라온다.


“와서 별제(瓦署別提) 한호(韓護)는 용심(用心)이 거칠고 비루한 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하는 것이 이서(吏胥:이방)와 같아,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들이 그와 동렬(同列)이 되기를 부끄러워하니 체직시키도록 하소서.”

그러니까, 품행이 바르지 않고 일처리도 졸라 못하는데다 입은 거칠고 성격이 드러워 다른 관리들이 이 새끼랑 일을 못하겠다고 불평을 하니 해고를 해라. 뭐 이런 뜻이다.



하지만 선조는 한석봉의 글을 몹시 아껴, 별제직을 그대로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관리들을 접대하는 자리에 함께 데려가거나 혹은 책을 필사하여 명나라 관리들에게 선물하거나 하는 식으로 챙겨준다.


그리고 급기야, 조정 신료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그를 가평군의 군수에까지 임명시킨다. 그 후… 사헌부가 상소를 올렸을 당시의 평가대로 그는 가평군의 살림을 말아먹는다.


경기도 동북부에서 강원도를 잇는 가평군은 나름 교통의 요충지로서 조선이 중요시하게 여기던 고을 중에 하나였고, 이는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왜군도 동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슬럼화 되어버린 가평군을 재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중책에 선조는 그저 글씨만 예쁘게 쓸 줄 아는, 그러나 관리로서의 실력은 형편없기 그지없고 거기에 성격도 드럽고 찌질한 인간을, 단지 자신이 좋아라하는 인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수로 임명한 것.


결국 탄핵을 받아 군수의 자리에서 쫓겨나 오늘날의 강원도 통천군의 현감으로 좌천되는데, 본디는 귀양을 보내도 시원찮을 정도로 재정을 탕진했으나, 선조가 나름 아끼는 신하인지라 현감으로 좌천되는 정도로 무마되었다.


하지만 현감으로 좌천되었어도 그의 찌질함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어, 왜란당시의 공신들의 교서 및 녹권을 개판으로 써갈겨대고 현감직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통천군 지역의 행정까지 말아먹는다. 결국, 선조 36년(1604)에 그의 유일한 팬이자 후원자였던 임금에게조차 버림받아 파직당하고, 이듬해에 외롭게 사망했다.


아이가 자신의 의지로 책을 읽고 그것을 즐기게끔 유도하는 것이 아닌, 뜻도 이해하지 못하고 스파르타식으로 강압적으로 훈련시키고 반복시키고 때로는 매도 들어야 한다는 조선일본의 이 기사.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다. 


앞으로 아이들에게 “찌질하게 살거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본다. 이런 논리를 펼쳐대는 인물이 문예창작학과의 교수라는 사실이 심히 안타깝고 심히 웃프기 그지없다.

원문: 흑과장님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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