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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훈련병들은 그를 고문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회수 2017. 5. 25. 2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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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두려워서, 비겁해서 그랬다

이 땅에 태어난 남자들이 청춘의 한 시기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 군대에 징집되는 경험이다. 나 역시 20여 년 전 입영통지서를 받아들었고, 버스를 타고 논산에 도착해 머리를 깎고 훈련소로 들어갔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군대 가던 날, 그날의 기억


어떻게 치러졌는지도 모르는 입영식. 따라왔던 가족과 친구들이 돌아간 후 갑자기 우악스러워진 조교의 욕설에 위압감을 느끼며 오리걸음으로 훈련소 내무반에 들어서면서 느꼈던, 군대라는 낯선 곳에 대해 느꼈던 두려움과 불안감은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사복을 싸서 편지와 함께 집에 소포를 부치면서 상당히 미묘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며칠 후 집에 도착한 내 옷을 받아 든 어머니는 그만 펑펑 우셨다고 한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이 시기에 나는 순하고 남을 미워해 본 적 없는 청년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나름 때 묻지 않은 청춘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 내무반에 스무 명씩 욱여넣어져 옷을 갈아입은 후 침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던 대기 시간들, 복도의 조교의 존재로 인해 암묵적으로 웃음과 대화가 일절 금지되어 있었지만, 처음 본 사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 소근소근 대화를 나누며 급격히 친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러다가 시끄럽게 떠든다고 걸려서 단체로 원산폭격 얼차려를 받기도 했지만 비슷한 나이대의 청춘들이 서로를 챙기며 친해지기에는 1주일간의 훈련소 대기시간이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나와 같은 훈련소 중대가 되어 함께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처음에 우리들은 태어나서 처음이랄 수 있는 사회와 격리된 단체 생활에도 서로서로 배려하며 어떤 연대감 같은 걸 느끼는 사이가 되었다. 군대에서는 결코 시간이 여유 있게 주어지지 않는데, 어린 시절부터 활동적인 행동들보다 어딘가 틀어박혀 책을 읽는 걸 좋아했던 나는 내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어설펐다. 게다가 내게 지급된 장비들 중 머리에 잘 맞지 않는 철모와 탄띠는 훈련 내내 나를 괴롭혔다.


분명한 것은 군대에서도 체질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초기부터 눈치 빠르고 요령 있게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 장비들은 남에 것과 슬쩍 바꿔치거나 요령껏 조교들과 친밀해져서 다시 지급받거나 했지만, 그런 요령 하나 없던 나는 딱 한 번 장비 교체 이야기를 했다가 알아서 몸에 맞추라는 조교의 불호령에 내무실로 달아나듯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매일 반복되는 훈련을 나가기 위한 집합은 내게 큰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었다. 어설프고 일해본 적 없는 손은 매번 군대의 투박한 장비들에 긁히고 상처 입기 일쑤였고 몸에 맞지 않는 장비들은 언제나 빠릿빠릿한 준비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만 빼고 모두 재빠르게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던 훈련소 동기들도 이제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니 각각 차이는 있지만 모두 허둥지둥 숨이 턱까지 차서 아찔할 만큼 따가운 햇살 아래 철모를 쓰고 총을 들고 도열해야 했던 것 같다. 연병장의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을 지나 훈련장으로 행군하면서 몸에 맞지 않는 장비들에 옥죄어 하고 힘들어 하며 6월의 더위에 헉헉 되었던 것 나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고문관 새끼”


같은 훈련 중대원 중에는 행동과 말투가 조금 어눌한 친구 A가 있었다. 전라도 어느 산골 마을 출신이던 그는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던 우리보다도 좀 더 적나라한 사투리에 행군하면 늘 손발이 같이 나가곤 하던 친구였다. 이 친구는 나보다도 이런저런 행동들이 더 어설펐으나, 마음만은 착한 친구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의 사투리와 어설픈 행동들을 지적하지 않았고 그의 사투리에 재미있어하고 그의 따뜻한 마음씨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훈련병 생활이 이어지면서 우리 대부분은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잃어갔던 것 같다.


6월에서 7월로 넘어가던 어느 뜨겁던 여름날, 우리는 무더위 속에 제식훈련을 받게 되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날씨에 구령에 맞추어 앞으로 가, 뒤로 돌아가 등을 전우조라는 이름으로 10여 명씩 조를 짜서 연습하다 보면 어느새 군복의 등은 완전히 땀에 젖어 달라붙고 안경에는 쉴새 없이 땀이 묻어나 앞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우리 조가 된 이 친구 A는 안타깝게도 손발이 같이 나가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제식의 기초는 앞으로 딛는 발과 반대편 팔이 같이 나가야 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비교적 차분하게 바라만 보던 조교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습한 날씨 때문인지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야 이 고문관 새끼야~ 이걸 한 시간째 못하냐? 너네 전우조! 저 새끼 이거 해낼 때까지 휴식 없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이제는 “알겠나?”라는 조교의 물음에 습관이 된 반응으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악을 썼지만, 모두가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여름철 변덕스러운 날씨답게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린 덕에 뜨거운 햇살은 피했지만, 쏟아지는 폭우에 안경에 물이 차 거의 앞이 보이지 않고 눅눅한 습기는 더 숨을 막히게 했다.


처음에는 서로의 실수에 “괜찮아”를 연발했지만, 제식을 무사히 통과하여 비를 피하며 쉬고 있는 다른 전우조를 보면서 쉴 새 없이 걸어야 했던 우리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점차 침묵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빗속에서 지친 누군가가 실수를 하자 우리 중에서 짜증 섞인 “아 씨팔”이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이후에는 살얼음판 같은 긴장이 우리를 지배했다. 조교가 고문관이라고 지목한 A는 처음에 잘하다가도 여전히 손발이 같이 나오기 일쑤였고 우리의 분노의 화살은 그를 향하기 시작했다.

아, 이 고문관 새끼.

마침내 같은 처지의 훈련병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A를 고문관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우리가 6주간의 기초 군사 훈련이 끝나는 내내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고문관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또한 ‘고문관’이라는 명칭은 이내 우리에게 두려움과 멸시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호칭이 되기 시작했다. 훈련소의 조교들 중 몇몇은 우리 중 누군가가 조금만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여도 망설임 없이 ‘고문관 새끼’를 연발했고, 그 명칭을 들은 날은 동료 훈련병들이 자신을 고문관으로 여기거나 부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이후 훈련병들은 이 순박한 친구인 A를 스스럼없이 고문관이라고 부르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까지도 그의 면전에서는 그를 고문관이라 부르지 못했다. 아마도 나도 그들과 똑같이 하기에 어떤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나도 두려워서, 비겁해서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숙영지 구축 훈련을 하던 날이었다. 2인 1조가 되어 텐트를 치고 숙영 훈련을 하는 날이었는데 이런 일에는 소질이 없었던 나는 텐트를 잘 칠 것 같은 짝을 원했다. 하지만 군대는 줄이다. 선착순 줄을 서는데 하필 A는 내 옆에 섰고, 나와 그가 텐트를 치는 짝이 되었다.


둘 다 그런 일에는 소질이 맞지 않는 데다 서로 손발도 맞지 않아서 그날 A와 나는 텐트를 가장 늦게야 칠 수 있었고, 가장 늦은 벌로 엎드려뻗쳐 얼차려를 받으며 조교에게 “고문관 새끼들”이라는 멸시를 들어야 했다.

어느새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이 되었고 좁은 2인용 군용 텐트 안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붙이고 들어앉아 있으면서 나는 그를 처음으로 고문관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얼차려를 받아 화가 난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내가 같은 고문관으로 불려졌고 같은 존재로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서로가 격한 말다툼을 벌인 상태에서 잠이 들었던 우리는 밤새 모기에 시달리고 비가 새어 들어와 물바다가 된 바닥에 반쯤 몸이 잠긴 채로 잠을 설쳐야 했다. 한여름인데도 바닥의 빗물로 몸이 흠뻑 젖은 우리는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다. 그럼에도 고단한 훈련은 미칠 듯한 졸음을 선사했고, 결국 서로가 너무 싫었지만 살기 위해 서로 껴안고 잠이 들었다.


정말 죽을 것 같은 추위 속에 벌벌 떨며 서로의 체온으로 겨우 쪽잠을 자야 했던 밤이 지났지만, A를 향한 나의 증오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것은 미움이나 증오의 감정보다는 나도 그와 동류가 되어 “고문관”이라는 군대 내의 천대받는 특수한 계층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그를 고문관으로 스스럼없이 불렀고 다른 이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그를 멸시했다. 그것이 내가 그와 동류가 아니라는 어떤 증명이었고, 그와 다르다는 나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표지였다.


훈련이 끝나갈 때쯤 나는 입소 할 때보다 체중이 10kg 가까이 빠져서 55kg의 차가운 눈빛을 가진 ,악만 남은 검게 탄 얼굴의 깡마른 남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 때라고 힘들지 않았겠냐만은 평소 운동이라고는 거의 해본 적 없는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이던 나의 여름 훈련소 생활은 예전에 순하고 여린 청춘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누군가가 내리는 명령을 수동적으로 생각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악과 깡만 남은 더 이상은 순진무구하지 않은 비쩍 마른 남자로 바꾸어 놓았다.


수료식을 하고 자대 배치를 기다리던 훈련 중대에서 나를 포함한 몇몇은 통신병으로 차출되어 먼저 훈련소를 떠나게 되었다. 그날은 운전병이나 다른 보직으로 차출 받은 인원들이 모두 떠나는 날이라 절반 이상의 훈련병들이 짐을 쌌다. 우리가 키보다 높게 짐을 욱여넣은 더플백을 메고 내무반을 나설 때 나는 A가 울고 있는 걸 봤다.  

잘 가라 이 새끼들아, 또 보자.
제대하면 꼭 보자!

그는 우리가 걸어가는 내내 내무반 창가에 달라붙어 울며 그런 아쉬움의 소리들을 토해냈다. 네가 그러면 안 되잖아, 우리가 널 어떻게 대했는데? 우리가 널 얼마나 소외시키고 멸시했는데 너는 왜 우리가 가는 게 그리 아쉽고 눈물이 나는 거냐?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을 때 더블백을 멘 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이죽거렸다.

저 고문관 새끼, 병신같이 왜 저러는 거야, 우리가 갈군 것도 모르나?
알면 달리 고문관이겠냐?

몇몇이 맞장구를 치며 그를 어이없어했지만, 더블백을 메고 열차를 타는 내내 나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제식 좀 못한다고 해서, 말투가 어눌해서, 사투리를 써서, 싸움을 못 해서, 말을 빨리 못 알아듣는다고 해서, 그 선하고 순박한 남자를 우리가, 아니 나에게 그를 그렇게 멸시하고 우습게 여길 자격 같은 게 있었을까?


그저 나는 닫혀진 집단 안에서 그와 같이 멸시받을까봐, 내가 그와 동류의 취급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며 그 무리에 동참했던 게 아마도 진실이었을 것이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중에서

나는 이젠 기억 속에서 서서히 얼굴이 흐려져간 훈련소 동기들 중 아직도 그의 얼굴만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소주 한 잔 같이 기울이고 싶다. 그때는 내가 잘못 했다고, 나도 두려워서, 비겁해서 그랬다고 사과하고 싶다.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의 아빠가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회사에서, 또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또 다른 A들을 본다. 삶 속에서 여전히 멸시받는 또 다른 고문관들을 본다. 이젠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지만 여전히 나는 용기가 없어서, 두려워서 그들의 편에는 서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아직까지도 끈덕지게 나를 두렵게 하고 비겁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아직도 어떤 힘에 억눌려 스무 살 무렵의 훈련소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원문: 지후대디의 Favo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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