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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내미 손이 참 따뜻하구나."

조회수 2018. 1. 16.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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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묻어났다.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는 태산같이 높은 존재였다. 할머니조차도 아들인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아버지의 엄격함은 가족뿐 아니라 아버지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마신다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저 성실히 일만 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묵묵히 그 자리에 산처럼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에 파문이 인 것은 35년 전, 같은 해에 할머니와 어머니를 연달아 잃으면서였다. 아버지는 방황했다. 지금 생각하니 아내와 어머니를 한 번에 떠나보낸 아버지는 우리보다 더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버지는 선을 봐 재혼했다. 우리는 새어머니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낯선 아주머니가 있는 집은 나의 집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뚝뚝했고, 새어머니에게는 정을 붙일 수 없었다. 우리는 한 명씩 대도시로 유학을 갔고, 나 역시 머릿속에서 아버지와 집을 지우고 20년 가까이 살았다. 최소한의 도리만 했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들이 훌쩍 자라 고등학생이 됐다. 서울로 유학 가고 싶다는 말에 문득 아버지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 옛날 손발톱이 닳도록 농사지어 우리 6남매를 도시로 유학 보낸 아버지. 엄마 잃은 슬픔에 아버지의 고생은 헤아리지도 못했다. 그제야 아버지가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지 짐작이 가 가슴이 먹먹했다.


그 후로, 어색하지만 여식의 도리를 하려 노력했다. 자주 찾아뵙고 용돈도 드렸다. 아버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산처럼 묵묵했던 아버지는 작은 일에 상처받아 울고, 기쁠 땐 웃는 사람이었다. 힘든 짐을 짊어지고 스스로를 가두어 왔다는 생각에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이제 94세를 앞두고 있다. 의사는 아버지 콩팥이 망가져 남은 시간이 6개월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날 나는 농사일에 치여 손톱이 닳고 닳은 아버지의 손을 난생처음 쓰다듬어 보았다. 고된 노동에 두껍고 딱딱한 아버지의 발바닥을 처음 만져 보았다. 아버지 생의 끄트머리에서야 딸이 잡아 준 손발이었다.


“딸내미 손이 참 따뜻하구나.”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묻어났다. 살아생전에 아버지와 못다 한 것들이 가슴을 짓누른다. 한 번이라도 더 포옹하고 손잡아 드리고 싶은데 평생 못해 본 애정 표현이 행동으로 옮겨질지 모르겠다.


“딸자식 철들 때까지 기다려 준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손과 발을 놓쳐 버렸다면 이 여식이 얼마나 애통했을까요? 인고의 세월, 아버지이기에 외로웠을 세월, 참고 또 참고 기다려 주신 것 거듭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이 여식에게 기회의 시간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박영미 님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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