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쓰는 반성문

조회수 2017. 10. 5.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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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미야, 네가 다섯 살 때쯤이니까 지금 너의 딸 엘리나 나이쯤이었을 게다.

경미야, 네가 다섯 살 때쯤이니까 지금 너의 딸 엘리나 나이쯤이었을 게다.


이민 오기 전, 어느 무더운 여름의 일요일이었지. 네 엄마가 아이스크림 사먹자고 하길래 아파트 단지 안의 슈퍼에 가서 가장 큰 걸로 한 통 사 왔지. 


느엄마와 네가 달라붙어 인정사정없이, 염치 불고하고, 양보와 눈치는 사양한채, 살벌하게 먹어 치우는데 난 기가 죽어 숟가락 한 번 들지 못했단다.


아빠는 놀라 자빠지고 까무러칠 뻔했지. 기껏 두 사람 앞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스크림 한 통이 흔적 없이 사라졌으니. 특히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먹은 아이스크림 양이 무시무시했으니까.


그 와중에 나를 슬프게 했던 건, 둘이서 눈이 벌게지도록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나에게 같이 먹자는 소리 한마디 없었다는 거다. 깨끗해진 아이스크림 바닥을 연신 박박 긁던 네가 한 말씀 점잖게 했지.

“아빠, 한 통 더 사 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기막힌 상황에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던 나는 반쯤 넋이 빠진 상태에서 탄식했다.

“아이고 맙소사. 이건 뭐 거지 떼도 아니고…….”


어쨌건 쩨쩨하고 치사한 가장이 되기 싫어 한 통 더 사 왔고, 억울했던 나는 이를 갈며 이번엔 실속 챙기리라 결심했단다. 그래서 잔머리 굴려 널 꼬드기기 시작했지.

“경미야, 이거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추워서 감기 걸리는데, 아이스크림 먹고 걸리는 감기는 뺨에 혹이 생기고 이마에 뿔이 난다고 하더라.”


넌 아비의 농간에 넘어가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었지.

“내일 많이 먹어야지.”라고 말하는데 얼마나 착하고 예쁘던지 모른다.


사건은 한밤중에 일어났단다.
 너와 엄마가 잠든 걸 확인하고 아빠는 발뒤꿈치 들고 도둑처럼 살금살금 냉장고로 직행,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끌어안고 주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신 나게 먹었지. 


순식간에 한 통이 없어졌어. 거뜬히 원수 갚은 뒤 잠들 때의 통쾌함이랄까.
 복수할 때의 이런 승리감, 안 겪은 사람은 모른다. 


그런데 새벽 다섯 시쯤 배가 살살 아파 잠을 깼지. 생각보다 상황이 급박해 화장실로 벼락같이 달려갔다. 

“콰앙! 뿌지직! 좔좔좔.”

해가 높이 떠오를 때까지 줄곧 화장실을 왔다 갔다 했어. 내 인생 최고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결국 그날 출근도 못하고 하루 종일 비실비실 반쯤 죽어 지냈지.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냉장고로 달려간 넌 곧바로 대성통곡을 시작, 아빠를 사탕 잘 주는 경비 아저씨로 바꾸자고 소리치며 보챘다.


느엄마는 나를 “어이구, 이 사기꾼~!”이라고 하더니 급기야 시도 때도 없이 동네방네 떠들어 댔지. 반상회에서까지 이 특별 뉴스를 전하는 바람에 그날부터 느 아빠는 아파트에서 어린 딸 아이스크림 훔쳐 먹고 천벌 받은 아버지로 찍혀 납작 엎드려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단다.


이제 아빠가 참회하고 너에게 용서를 구하는 뜻에서 30년 만에 반성문을 쓰고 나니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사람은 죄짓고는 발 뻗고 편히 못 자는 거 아니겠느냐.


한 가지 더 고백할 것은, 너와 사위 그리고 두 손주가 가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내 가슴이 얼마나 뜨끔거렸는지 모른다.


이제 이 반성문으로 죄 씻김 받으면 느 아비 맘이 편해질 테니까 다음번엔 아이스크림을 사 와도 된단다.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최종관 님이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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