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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익선동에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조회수 2017. 7. 21.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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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슈퍼의 브랜드 스토리

익선동은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인사동, 남쪽에는 청계천, 북쪽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둘러싸인 동네다. 조선 시대부터 서울의 중심지로 번성했었던 종로 한복판에 자리해 있는 셈이다. 지금도 종로3가역의 5호선 출입구가 바로 연결돼 있어서 뛰어난 교통 편의성을 자랑한다. 이처럼 좋은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익선동이 지금까지 '낯선 동네'로 남아 있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익선동 골목은 식민지 시절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건설 회사를 운영하던 독립 운동가 정세권 씨가 일본식 신시가지 계획을 막고자 중산층 이하 서민들을 위해서 만든 개량 한옥촌이다. 당시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한 그는 친일파에게서 건물을 매입해 익선동에 한국적인 전통 건축 양식을 적용하여 일본식 건물 대신에 한옥 마을을 조성했다. 이후 2004년에 익선동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철거를 통하여 고층 복합 건물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건물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여 10년이 넘도록 개발이 미뤄졌고, 지난해엔 계획이 완전히 무산되면서 익선동은 도시형 한옥 마을로 개발된 뒤 100여 년이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49.6제곱미터(15평) 안팎의 한옥 100여 채가 좁은 골목길을 따라서 늘어서 있고, 주민들이 땜질을 하듯 조금씩 보수해 둔 것 외에는 장독을 놓는 터 또는 실외 화장실 같은 근대식 생활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잊혀진 동네였던 익선동을 다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꺼낸 이들은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의 젊은 창업자들이었다. 1920년대 이후 지금껏 거의 개발되지 못한 채 방치되었던 탓에 도심에선 드물게 '옛 동네'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던 익선동에 창업자들이 둥지를 튼 것. 프랜차이즈 업체가 진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주변 환경이라든지, 서촌이나 북촌처럼 이른 시간에 상업화 될 가능성이 비교적 낮다는 것이 그들이 익선동을 선택한 이유였다. 전통 한옥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고서 그 안에 저마다의 감각으로 독특한 개성을 불어 넣었다.


충청남도 공주 토박이인 박지호, 신서영 대표가 빠르고 바쁜 서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 지난 2015년 4월 오픈한 '거북이슈퍼'도 그 중 하나다. 그들은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가는 모습이나, 지하철에서도 다들 무언가를 하고 있는 광경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익선동의 서울 같지 않은 친숙한 모습에 반한 박 대표는, 평소에 여유를 모르고 살아 왔거나 타향살이에 지친 사람들을 위하여 고향에 있던 가정집을 개조한 정겨운 슈퍼를 떠올려 '거북이슈퍼'의 문을 열었다. 누구나 부담 없이 편안하게 들렀다 갈 수 있는 쉼터가 되는 것이 '거북이슈퍼'가 바라보는 목표다.

주민들도 여느 동네 슈퍼처럼 편하게 이용하는 곳.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동네 슈퍼 같은 '거북이슈퍼'는, 외관상 특별하지 않지만 손님들에겐 다른 의미로 특별한 공간처럼 느껴지도록 인테리어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덕분에 '거북이슈퍼'는 익선동 골목의 가게들 중에서도 복고 분위기가 진하기로 유명하다. 반쯤은 헐린 콘크리트 담장 뒤의 시골 가겟방을 재현하여 그 안에서 연탄불에 직접 먹태를 굽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연탄불에 직접 구워 주는 마른 안주는 이곳의 상징이다. 과자, 아이스크림, 컵라면부터 먹태, 육포, 쥐포 등과 맥주를 판매하고 있다.


제일 잘 나가는 메뉴는 '가맥'으로, '가게 맥주'의 줄임말이다. 과거에는 슈퍼마켓을 '가겟방'이라 불렀고 '가게에서 먹는 맥주'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가맥'의 유래는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주엔 탁자 몇 개를 놓고 과자나 오징어 같은 간단한 안주에 맥주를 파는 가게들이 생겨 나고 있었다. 중앙동에 있던 '영광상회'가 그 원조라고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이후 '임실슈퍼', '전일슈퍼', '초원슈퍼' 등이 황태에 찍어 먹는 독특한 장(醬)을 개발하면서 '가맥'의 인기도 덩달아 높아진 것이다. 그렇게 40여 년 동안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가맥'은, '거북이슈퍼'를 찾은 손님들에게도 큰 즐거움을 선물하고 있다.

예전부터 어떤 곳의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 하나가 선택되는 최우선 순위는 탄생의 '유래'였다. '히스토리'보다 강력한 '스토리'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고, 어떤 시간 속에서 성장해 온 가게인지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대한 신뢰도와 자부심이 커지기도 했다. 물론 '스토리'가 소통되는 창구 자체가 제한적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정제되고 선별된 이야기만이 의미를 가지는 때는 아니다. SNS를 통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과 기회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공간'이 혼재한 익선동이 우리에게 주는 묘한 향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방문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적당한 상권을 찾던 창업자들에게 그러했고,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 속에서의 여유를 갈구하던 소비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시간이 스토리에 미치는 힘은 무겁고 강하다는 것이다. 익선동이라는 동네에서 시작해서 박 대표의 신념까지 더해진 '거북이슈퍼'에는 생애 주기가 담겨 있고, 이야기가 있고, 개성이 있다. 언제나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낡은 것'으로 자리 잡은 '거북이슈퍼'는 그곳만의 이야기와 사람들의 기록에 힘입어 강한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 '골목 창업'은 대형 상권보다 진입 장벽이 낮고 소자본 투자가 가능하여 실속형 창업자에게 적합하다. 좁은 골목길과 도로는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매력도 갖고 있다. 익선동 한옥 마을과 '거북이슈퍼'가 유명한 이유도 주택가 골목 상권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다. 특성상 작은 점포가 많기 때문에 공간 제약 등에는 신경을 써야 하니, 1인 창업이 가능한 꽃집이나 미용실, 사진관, 분식집, 장난감 가게 또는 카페, 소규모 주점 등이 무난하다. 거리의 이야기를 잘 살릴 수 있는 인테리어와 볼거리를 통해 '내 가게만의' 테마와 특별함을 갖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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