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오피스에서 살해된 대기업 여성

조회수 2018. 5. 31. 10: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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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미제 사건

1997년  3월 19일 오후 5시경. 


도쿄 시부야 구에 있는 네팔 음식점의 점장 M은 가게 근처에 있는 아파트 ‘희수장( 喜寿荘 )’으로 향했다. 희수장 앞을 지나가던 M은 101호의 창문이 열려 있는 걸 발견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현관에 놓인 여자 신발과 방문 너머 누워 있는 상반신이 보였다. 


101호 안으로 들어선 M은 목이 졸린 채 누워 있는 여자의 시체를 발견하고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여자는 버버리  코트와 파란 투피스 차림이었고 속옷도 제대로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에는 볼펜 한 자루가 휘감겨 있었다. 


숄더백 안에는 현금 473엔과 사용하지 않은 콘돔 스물여덟개가 있었고, 지갑 속에는 명함이 들어 있었다. 명함에 적힌 이름은 “도쿄전력 도쿄 본사 기획부 경제조사실 부장(副長 ) 와타나베 야스코”였다.  

도쿄전력의 간부급 사원이 왜 유흥가에 있는 낡은 아파트에서 살해된 것일까? 조사에 착수한 경찰은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게이오대를 졸업하고 굴지의 대기업 도쿄전력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던 와타나베가 퇴근 후에는 시부야 거리에서 몸을 파는 매춘부로 변신했던 것이다. 일본 사회는 들끓었고 ‘도쿄전력 OL 살인 사건’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스캔들이 되었다. 

낮의 얼굴과 밤의 얼굴 


일본 사회를 흥분시킨 것은 와타나베의 사생활에서 드러난 극단적인 갭이었다. 와타나베 야스코는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80년 도쿄전력에 종합직으로 취직했다. 일본 기업에는 ‘종합직’과 ‘일반직’으로 구분하여 직원을 채용하는 관례가 있는데, 종합직은 임원급 승진을 염두에 둔 핵심 커리어 코스이고 일반직은 일반 사무직을 담당하는 평사원 코스이다. 이 관례는 사실 종합직으로는 주로 남성을, 일반직으로는 주로 여성을 채용함으로써 기업 내 성차별을 고착화하는 방편으로 이용되어왔다.1 와타나베는 1985년 남녀 고용 기회 균등법이 시행되기 몇 년 전 여성으로서는 극히 드물게 대기업의 종합직으로 채용되었으니, 그만큼 우수한 인재였다는 뜻이다.

(중략) 와타나베 야스코가 ‘일탈’을 시작한 것은 사망 6년 전인 1991년부터로 추정된다. 이 밤의 일탈은 대기업 사원이 따분함을 벗기 위해 저지르는 심심파적의 수준이 아니었다.   


와타나베는 사내 유연 근무제를 이용해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고 5시경 퇴근한 후, 시부야에 있는 109 쇼핑몰에서 화장을 고치고 거리로 나섰다. 하루에 네 명 이상의 손님을 받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끼니는 어묵과 캔맥주 등으로 허겁지겁 때웠고 매일 막차를 타고 귀가했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96년부터는 주말이나 휴일에도 쉬지 않고 시나가와 구의 매춘 클럽에서 대기하며 손님을 받았다. 오후 12시부터 5시까지 매춘 클럽에서 일한 뒤에는 다시 거리로 나가 자정까지 호객을 했다.

와타나베가 고행을 방불케 하는 이런 생활을 지속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돈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와타나베 야스코의 사망 전 연봉은 1천만 엔 정도로, 1990년대 일반 여성 사무직 연봉과는 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버지의 유산도 있고 여동생도 일을 했으니 여자 세 명이 살기에 부족함은 없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꼬박꼬박 거리로 나섰고, 돈이 없다는 상대에게는 대폭 할인을 해주면서까지 화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 내역을 성실하게 수첩에 기록했다.  (중략)

밝혀지지 않은 진실 

그럼 대체 와타나베 야스코를 죽인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범인이 특정되고 심판을 받았다면 이 사건은 머지않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건은 점점 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시체 발견으로부터 두 달 후인 5월 20일, 도쿄 경찰은 네팔 국적의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를 체포했다. 마이나리는 당시 살해 현장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네팔인 동료 네 사람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누나가 네팔에 들어오면 함께 이주할 계획으로 희수장 관리인으로부터 101호의 열쇠를 받아 가지고 있었는데, 경찰은 이것이 그의 혐의를 입증하는 1차 증거라고 보았다. (중략) 


마이나리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그가 와타나베와 몇 차례 관계를 가진 적이 있으며 DNA 검사 결과 101호에서 발견된 콘돔에 들어 있던 정액이 그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불리해졌다. 

무기징역형을 언도받은 고빈다 프라사드 씨.

2000년 4월 14일 1심 재판부의 오부치 도시카쓰 재판장은 살해 현장에서 와타나베와 마이나리 외에 제3자의 체모가 발견된 점을 들어 마이나리에게 무죄를 판결했다. 검찰은 항소했고 2000년 12월 22일 2심 재판부의 다카기 도시오 재판장은 1심의 판결을 뒤집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때 마이나리는 “신이시여,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불법체류자인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분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마이나리에 대한 동정 여론을 중심으로 시민 단체 ‘무고한 고빈다 씨를 지지하는 모임’이 결성되어 시위를 벌였다. 

변호인단은 법의학 감정을 거쳐 콘돔 안에 있던 마이나리의 정액이 사건 당일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를 제출했다.  2011년 도쿄 고등 검찰청은 와타나베 야스코의 시신에서 채취된 체액과 체모의 DNA가 마이나리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12년 6월 도쿄 고등법원은 마이나리에 대한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10월에는 피해자의 손톱 밑에서 마이나리가 아닌 제3자의 DNA가 검출되었음이 밝혀졌고 이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결국 이례적으로 검찰이 무죄 주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2012년 도쿄 고등법원은 고빈다 마이나리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마이나리는 국가를 상대로 배상 청구를 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그에게 6800만 엔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마이나리는 네팔로 귀국한 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 권의 수기를 써서 발표했다.

이리하여 ‘도쿄전력 OL 살인 사건’은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와타나베 야스코가 어떤 생각을 품고 시부야의 밤거리를 헤맸는지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바로 ‘도쿄전력 OL’이다”라고 외치는 여성들,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분열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이 와타나베 야스코가 살해된 그 장소를 찾아가 꽃을 바치고 있다.

* 도쿄전력 OL 살인 사건
* 글: 유진(편집자)
* 출처: 미스테리아 18호
* 미스터리 전문 매거진 <미스테리아> 18호에 수록된 글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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