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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켤줄도 몰랐던 국가대표의 반전, 에이스 직장인 됐다

조회수 2020. 9. 23. 11: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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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동메달리스트가 출근 전 거울보고 백 번씩 인사한 까닭은?

수업료도 내지 못할 만큼 집안이 어려웠던 중학생은 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해 레슬링을 시작했다. 운동화 살 돈이 없어 실내화를 신고 죽기 살기로 매트 위를 굴렀다.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낡은 실내화를 더 이상 신을 수 없어 포장마차에서 일하던 어머니를 찾아갔다.


낡은 점퍼와 고무신을 신고 일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니 “운동화 한 켤레 사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학교 운동장으로 발길을 돌린 그는 눈물범벅이 된 채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다. 한겨울 다 떨어진 실내화를 보며 그는 ‘국가대표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출처: jobsN
LH 중앙공동주택관리지원센터 신상규 차장

이 소년은 1989년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1990년 러시아 민스크 국제대회 2위를 시작으로 베이징 아시안게임 동메달, 1991년 이란 아시아선수권대회 1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선 5위를 기록했다.


1990년대 초반 레슬링 자유형 62kg급을 ‘평정’했던 신상규(51)씨 얘기다.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냈기에 지도자로 어디선가 후배를 키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국내 최대 건설 공기업인 한국토지주택공사(이하 LH)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중앙공동주택관리지원센터 신상규 차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건넸다. 그가 ‘한 가닥’하는 레슬링 선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 만두처럼 말려들어 간 귀, 일명 ‘만두 귀’뿐이었다. 매트에 머리를 대고 구르는 동작을 많이 하는 레슬링이나 유도선수들은 만두 귀를 가진 사람이 많다.


잘나가던 레슬링 선수, ‘천덕꾸러기’ 된 이유


신 차장은 1990년 (구)대한주택공사에 체육직으로 입사하면서 LH와 첫 인연을 맺었다. LH소속으로 국내외 대회에서 눈부신 성적을 거뒀지만,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 훈련했어요. 하지만 1994년 일본 전지훈련 도중 어깨와 무릎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두 번이나 큰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부상을 극복하지 못했어요. 레슬링 선수로는 전성기인 28살 때였죠.”

출처: 신 차장 제공
바르셀로나 올림픽 직전(왼쪽에서 둘째·왼쪽), 베이징 아시안게임 당시 신상규 차장

대학에서 체육교육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교사 자격증도 있었고, 지도자로 오라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체육직에서 행정직으로 전직(轉職)해 회사에 남기로 했다. “고민이 많았어요. 은사님을 찾아갔더니 ‘운동 말고 다른 것으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LH에 남아 승부를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출처: jobsN
만두처럼 말린 귀에서 그가 전직 레슬링 선수였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좌), 미술에도 재능을 보였던 그가 어린 시절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꿈을 꾸며 그린 그림

처음으로 발령받은 곳은 전북지역본부. 그에게 주어진 일은 임대주택을 짓고 남은 부지를 판매하는 일이었다. 중학교 이후 운동만 해온 그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회사 업무를 위해 머릿속에 넣어둬야 할 법령집은 한자로 돼 있어서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울렁거려 받지도 못했고요. 그야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천덕꾸러기였죠.” 하지만 동료들은 그의 곁을 지켜 줬다. “제 업무를 나눠 맡으며 적응하기까지 기다려줬어요. 선배들은 업무시간이 끝나고서 저를 붙잡고 ‘과외’까지 해주셨죠.”


보상 업무의 '달인'이 되다


직장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현관 앞에서 거울을 보며 ‘안녕하십니까, 신상규입니다’라고 외치며 백 번씩 인사했습니다. 운동선수가 아닌 직장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저만의 ‘의식’이었습니다. 남들보다 2시간씩 일찍 출근해 텅 빈 사무실에서 한자로 된 법령집을 공책에 일일이 옮겨 적기도 했어요. 한자사전을 옆에 두고 어떻게 읽는지 뜻을 무엇인지 찾아가면서요. 퇴근 후엔 조카뻘인 초등학생들과 햄버거를 먹어가며 컴퓨터학원도 다녔죠.”


1년 정도 이렇게 살았더니 업무에 익숙해졌다. 이후 7년은 판매업무를, 다음 15년은 토지 보상 업무를 맡았다. 지금은  LH에서 ‘보상 업무의 달인’으로 통하는 신 차장에게도 사업 예정지역의 토지나 건물 등을 보상해주고 주민들을 내보내는 일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주민들과 협의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경우 민원과 마찰이 많은 일’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큰 사고 없이 보상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비결로 그는 ‘진심’을 꼽았다.

출처: 신상규 차장 제공
신 차장이 두 아들과 함께 장애아동시설을 방문했다

“2015년 한 사업지구에 있는 장애아동시설 철거 문제로 큰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시설이라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었죠. 마음을 다해 시설 원장님과 함께 이전할 만한 곳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협의가 잘 끝나 그 시설은 무사히 이전할 수 있었고, 그때의 인연으로 초등학생인 쌍둥이 두 아들과 함께 지금까지도 봉사활동을 다니고 있습니다.”

출처: jobsN
선수시절 받은 각종 메달과 LH 입사 후 받은 표창장 등을 들어보이는 신상규 차장

신 차장은 업무 성과를 인정받아 국토부장관 표창을 비롯해 LH 사장 표창, 제도 개선 표창 등을 받았다. 지난해엔 LH 전 직원을 대상으로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변한다’는 주제로 강연도 했다. 강연이 끝나자 동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 자리에 있던 박상우 LH사장은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으로 불렸던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에 빗대 그에게 ‘스티브 상규’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쉰 넘은 나이, 또 다른 도전


신 차장은 올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15년간 해오던 보상 업무를 뒤로하고, 지난 1월 중앙공동주택관리지원센터(이하 지원센터)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지원센터는 아파트 등 국민의 70%가 거주하는 공동주택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예방하고,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2016년 8월에 문을 열었다. 입주자대표회의, 관리비 관련 민원상담은 물론, 공사나 용역의 타당성, 시설관리에 대해 자문 등 공동주택 관리와 관련한 전반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신 차장은 발령을 받자마자 공동주택 관리 전문가가 되기 위해 올해 7월에 치러질 주택관리사 1차 시험 합격을 목표로 ‘열공’중이다. 

출처: jobsN
지원센터 직원들과 회의 중인 신상규 차장(좌), 가족과 함께 진주 LH본사를 방문했을 때

그는 "'행복한 주거'라는 회사의 비전을 실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곳으로 왔다"면서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의 주거 복지를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뛰겠다”고 했다. 신 차장과 함께 일하는 한 동료는 “자신이 원했으면 익숙한 보상업무를 계속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자원해서 이 곳으로 온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동료들은 물론 취업난에 어려움을 겪는 취준생에게도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도전과 변화는 그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렵잖아요. 취업을 준비 중인 후배들도 두려울 것이란 걸 잘 압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 성공할 수 있을 거라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2년 전 컴퓨터도 켤 줄 몰랐던 제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처럼요.”


글 jobsN 안중현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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