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공작원→공무원→밥샙 잡은 격투기 선수..현재 직업은?

조회수 2020. 9. 25. 22:3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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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출신 격투기 선수 김종대씨
HID 출신 격투기 선수 김종대씨
‘야수’ 밥샙과 대결해 승리하기도
3시간씩 자며 고물상 운영해 연 20억

고물상 업체 승보철강을 운영하는 김종대(36)씨는 한때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스타였다. 2011년 XTM의 격투기 프로그램 ‘주먹이 운다’에 출연해 ‘주먹맛’을 알렸다. ‘북파공작원 출신 격투기선수’로 유명세를 탔다. 2012년 6월 김씨는 ‘야수(the beast)’라 불리는 미국 격투기 선수 밥 샙(44ㆍ고센)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했다. 당시 김씨는 밥샙을 KO로 이겼다. 밥 샙은 2005년 ‘골리앗’ 최홍만과 K-1 대회에서 불꽃튀는 대결을 벌였던 선수다. 당시 대결에서는 최홍만이 밥 샙을 상대로 2대0 판정승을 거뒀다. 

출처: 유튜브 캡쳐
2012년 '야수' 밥샵과 '북파공작원' 김종대선수의 대결은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는 고물상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작년 한 해 매출 20억원을 기록했다. 첫 직장은 북파공작원.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 직업이다. 무엇이 그를 특수부대와 격투기, 고물상으로 이끌었을까.


’돈 많이 번다’는 말에 자원한 북파공작원


강원도 원주 출신인 김씨의 첫 직장은 북파공작원 특수부대였다. 경제 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금융 지원을 받은 때인 1997년부터 김씨의 집안 형편은 급격히 나빠졌다. 밥숟가락 하나 덜겠다는 생각에 고교 졸업 직후인 99년 병무청의 문을 두드렸다.


이때 병무청에서 모병관을 만났다.


“너네 집 잘 살아?”

“못 살아서 군대에 가려 합니다.”

“전역하면 8500만원 주는데 북파공작원 한 번 해 볼래?”


그렇게 특수부대에 입대했다. 동기는 24명. 계급도 군번도 없는 기밀 부대라고 김 대표는 말했다. 임무 수행 중 신상이 드러날 경우 국가에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기록도 변변히 없다. 편지ㆍ전화ㆍ면회 등 모든 외부 접촉도 단절된다.


훈련이 어땠냐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딱 죽기 직전까지 훈련했죠. 얼어 죽는다는 말을 실제로 체험해요. 겨울에 맨몸으로 산속을 헤쳐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겨울철 산속에는 눈이 사람 허벅지까지 쌓여요. 뛰어가니깐 땀이 바지에 달라붙어서 얼음이 되죠. 온몸에 쥐가 나요. ‘생명의 침’이라는 도구를 허벅지에 찔러가면서 훈련했어요.”

출처: MBC 휴먼다큐 '그날' 캡쳐
김종대 선수는 2012년 공로를 인정받아 특수임무유공자증서를 받기도 했다

한 번에 경북 영주에서 전북 남원까지 약 300㎞ 산길을 이동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지금도 밤눈이 밝아 어두워도 대낮처럼 환하게 보인다고 김 대표는 덧붙였다.


전역을 하게 된 것은 2004년.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LG전자의 초콜릿폰이 히트를 치고, 고속철도 KTX가 개통된 해였다. 김씨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고물상의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냈다. 경찰특공대 시험에는 낙방했다.


2009년 日 격투기 데뷔…공무원 병행하며 ‘대결’


김씨가 격투기에 입문하게 된 것은 순전히 친구 때문이었다. 상지대 야간 과정에 입학해 만난 친구가 “격투기 배워 나중에 체육관을 차리겠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고, 원주 시내에 있는 원주팀포스 체육관을 찾았다. 로드FC 정문홍 대표가 당시 관장이었다. 정 관장은 “싸움꾼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는 말로 김씨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지만 한 달 뒤 정중히 다시 찾아가고 테스트를 받은 뒤 소속 선수로 들어갔다. 김씨는 “한 시간 동안 현역 선수를 상대로 버티니깐 정 대표가 ‘훈련비 안 받을 테니 선수를 해 보라’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출처: 유튜브 캡쳐
'다윗과 골리앗'을 방불케하는 밥샵과 김종대 선수의 체급 차이

데뷔는 2009년 일본에서 했다. 일본에서 열린 M-1 격투기 대회에 출전해 스모 선수 출신인 기무라 초우헤이(37ㆍ木村長平)와의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김씨는 경기 초반 왼쪽 눈에 훅을 맞는 등 고전했지만, 펀치를 날리면서 상대를 실신시키고 짜릿한 역전 KO승을 따냈다.


이후에는 낮에는 공무원, 밤에는 격투기 선수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국가유공자 특채 전형으로 교육청 소속 운전직 공무원에 뽑혔다. 하루에 한두시간씩 훈련을 하면서 감각을 유지했다. "이때만큼 격투기가 재밌었던 적은 없었다"고 김씨는 말한다.


그는 회당 대전료 20만원씩 받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격투기 시합에 참가했다. “군에서 산을 타며 훈련받을 때에는 ‘이 체력을 어디다 쓰나’하는 이야기도 했는데, 진짜 제 일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 전에 무대 설치도 도맡아서 하고, 경기가 끝나면 뒷정리까지 했죠. 그래도 펄펄 날았어요.”


경기가 끝날 때나 동네에서 운행을 할 때에는 “사인을 해 달라”는 동네 꼬마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빈 박스 줍는 게 어때서 당당한 내 사업”


‘유명한 9급 공무원’의 삶은 하루아침에 끝났다. 아버지가 쓰러지면서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김씨에게도 생겼다. 2013년 10월 김씨의 아버지는 고물 철거를 하다가 파편에 맞고 병원에 후송됐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망하기 직전인 고물상의 재무 상태였다.


“아버지 명의로 빚이 1억원 있었어요. 전기세가 3개월 밀려서 전기가 끊기기 직전이었고, 병원비도 수백만원이 당장 필요했죠.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몰라서, 아내와 아이들을 일단 처가로 보냈어요. 그리고는 밤새 고물상에서 살았죠.”

출처: 본인제공
김씨가 운영하는 원주에 위치한 고물상 '승보철강'

그렇게 김씨는 어쩔 수 없이 가업 승계를 하고 고물상 사업에 뛰어들었다. 망한 고물상을 일으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격투기를 하면서 알고 지낸 지인들에게 승보철강 명함부터 돌렸다. 신뢰를 쌓기 위해 고물이 나왔다는 연락이 오면 언제 어디든 달려갔다. 매일 새벽 5시에서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그렇게 김종대씨의 하루 21시간은 흘러갔다.


옛 동료들에게 섭섭했던 감정을 느꼈던 적도 있다. 언젠가 원주 시내에서 만난 그의 교육청 옛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전에 하나로마트 앞에서 폐지를 담을 때 아는 척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그는 “나는 떳떳한 내 사업하고, 직원 월급도 밀리지 않고 세금도 내고 있다”면서 “다음에도 못 본 척할 거면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렇게 5년. 김씨의 고물상은 드디어 재기의 발판을 닦고 있다. 승보철강은 작년 한 해 동안 매출 20억원을 기록했다. 직원 2명에게는 월급 270만원씩 줬다. “내가 못 먹어도 직원 월급은 밀린 적이 없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텼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돈 때문에 비자발적 별거를 했던 아내와 아이들과 내년 2월에 다시 합칠 계획이다. 최근 분양받은 원주 시내 아파트에 입주한다고 한다.


글 jobsN 김지아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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