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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유학까지 포기하게 만든, 선배의 따끔한 한마디

조회수 2020. 9. 25. 22: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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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예술마을로 떠나다》 펴낸 천우연
《세계 예술마을로 떠나다》 펴낸 천우연

“10년 동안 문화기획자로 일하다 영국 유학을 가려고 준비하던 때였어요. 저를 잘 아는 선배가 ‘우연아, 너답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제 내면을 들여다보니 유학으로 학력을 높여 더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초심을 되찾고 싶어 훌쩍 양평으로 갔습니다. 문화기획 일을 시작하던 시절, 달빛 아래 야외 콘서트가 열렸던 곳이죠. 신이 나서 티켓을 나눠주며 ‘재미있을 거예요. 잘 보세요’라고 되뇌던 20대 초반의 나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는 유학 대신 세계의 예술마을을 찾겠다고 계획을 바꾸었다. “7년간 몸담았던 마지막 직장에서는 공공기관의 문화용역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기획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좋은 사례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면서 ‘언젠가는 직접 찾아가고 싶다’고 개인 폴더에 저장해둔 곳들이 많았죠. 그곳에서 예술이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낯선 곳에 나를 내던지고 삶에 대한 질문의 답을 하나하나 찾아 나가고 싶었습니다.”


스코틀랜드, 덴마크, 미국, 멕시코의 예술마을에서 각각 3~6개월씩 머물다 돌아온 그는 그 이야기를 담은 책 《잃어버린 두근거림을 찾아 세계 예술마을로 떠나다》를 펴냈다. 지금 그에게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다. 고향인 전남 해남 땅끝마을의 아름다운 바닷가에 마을 주민과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예술가들이 자연에서 얻은 영감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마을 주민과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세계의 젊은 디자이너, 건축가들과 함께 짓고 싶다고 말한다.


이제 30대 중반이 된 천우연 씨를 보면서 쉽게 길들지 않고 언제나 생기발랄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가는 ‘빨강머리 앤’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입시 위주의 억압적인 환경 때문에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은 나와야지’라는 부모님의 강권으로 수도권 대학의 유아교육과로 진학했습니다.”대학 시절 그는 전공 공부보다는 공연이나 전시를 보러 다니는 데 열을 올렸다.


“고등학교 때 처음 찾은 미술관에서 화가 장욱진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 아련하게 느꼈던 감정들이 예술로 표현되는 게 신기했죠. 사람들에게 예술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문화기획자를 소개한 기사를 본 후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문화기획을 배울 수 있는 아카데미를 찾았죠. 거의 공연을 보러 다녔습니다. 덕분에 20대 초반에 문화기획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예술가인 마을 

클래식 전문 기획사, 뮤지컬 제작사를 거쳐 ‘다빈치처럼 생각하기’ 같은 전시 기획도 했다. 2007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6개월 동안 뮤지컬만 실컷 보고 왔다. “한국 뮤지컬은 두루 섭렵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뮤지컬 시장을 경험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귀국 후 문화기획사에 입사한 그는 기획팀장을 맡아 입찰 경쟁에 뛰어들었고,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제 내면은 시들시들 말라가는 것 같았어요.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집념과 오기로 질주하다 보니 이전 같은 설렘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사랑했던 일조차 싫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질주를 멈추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강박에서 벗어나 내 마음에 귀 기울이고 저 자신을 알아나갈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2015년 맨 먼저 찾아간 스코틀랜드의 모니아이브는 600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주민의 절반 이상이 예술가였다. 완만한 언덕과 두 개의 큰 물줄기에 둘러싸인 마을에서는 매달 크고 작은 축제가 벌어졌다. 그는 이곳에서 석 달간 머물면서 마을 일에 적극 참여했고, 떠날 때는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담은 영상을 마을 주민에게 보여줬다.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뜻하게 안아줄 때 그는 “자연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세상살이의 따뜻함을 다시 느끼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덴마크에서는 반년 동안 시민학교에 다녔다. 그는 유리공예와 도자기로 유명한 예술 섬인 보른홀름의 시민학교에서 회화와 도자기, 금속공예 수업을 들었다. 온종일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아다니거나 들판을 거닐고, 예술가의 작업장을 찾으면서 어릴 적 모험심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미국에서는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는 문화예술단체인 미네소타의 ‘야수의 심장’ 인형극단을 찾았다.


“‘야수의 심장’ 예술감독인 샌디 스필러는 문화기획 일을 할 때부터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극단에서 주최하는 메이데이 축제의 봉사자와 인턴작가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샌디에게 이메일을 보냈죠. 함께 생활하고 싶다는 욕심까지 내비쳤더니 흔쾌히 2층 방을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메이데이 축제는 극단이 40여 년간 주최해온 마을 축제로, 주민이 함께 만든 인형을 들고 행진하면서 지역사회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루 축제를 위해 넉 달을 준비하죠. 샌디는 행사 자체보다 주민이 서로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나누며 협력하는 준비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마을 일은 행사가 아니라 살아가는 일이야’라고 했던 그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유 

마지막으로 멕시코에서 넉 달 동안 생활했다. 그는 멕시코에 들어선 순간 강렬한 색과 넘치는 에너지를 느꼈고, 더 머물고 싶어졌다고 말한다. 멕시코 원주민의 삶과 예술에 대해 알고 싶었고, 그들의 나무인형 알레브리헤의 정교한 문양에 매혹됐다. 그는 알레브리헤로 유명한 마을의 장인 집에 머무르면서 장인들의 도움으로 직접 만든 알레브리헤를 이용해 동화책을 만들었다.


“고향 집과 가까워 자주 찾았던 미황사의 창건설화를 담은 동화책이에요.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던 소가 멈춘 곳에 절을 세웠다는 설화죠. 설화에 등장하는 소를 알레브리헤로 제작한 후 촬영한 사진을 이용해 동화책을 만들었습니다.” 1년 반 만에 한국에 돌아온 후 책 쓰기에 매달렸던 그는 현재 서울의 북촌문화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요즘은 주민과 함께 ‘북촌 주민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조용한 여행’을 당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는 준비되는 대로 고향인 땅끝마을로 돌아가 꿈꾸던 일을 하겠다고 말한다.


“세계의 예술마을들을 다니면서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된다는, 나답게, 꿈꾸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용기와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그곳을 어떤 모양으로 바꾸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없어요. 너무 건방진 생각이니까요. 샌디처럼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예술은 먼 데 있지 않다고, 할머니들이 키우는 마늘밭, 신작로에 펼쳐놓고 말리는 고추가 예술이라고 알려드리고 싶어요.”


글 jobsN 이선주 조선뉴스프레스 객원기자, 사진 김선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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