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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서 당한 '개 물림' 사고, 서울 부부를 새삶으로 이끌다

조회수 2020. 9. 25. 22: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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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망진' 서울내기 해남·해녀 김형준·김은주 씨 부부
체험이 아니라 삶의 길로 선택했고 지금은 행복하다

부부는 서울에서 꽤 잘나가던 사업가였다. 남편은 디자이너로, 부인은 비즈 공예가로 활동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런 부부가 어느 날 문득 “아, 우리도 많이 늙었구나, 나이를 먹었구나. 삶의 의미가 대체 뭐지?” 하는 상실감에 빠졌다.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할 즈음 부부는 취미로 프리다이빙을 시작했다. 물속 세계는 또 다른 위안이자 활력이었다. 그 편안하고 강렬한 느낌에 끌려 부부는 하던 사업을 접고 바다가 있는 제주도에 정착하기로 했다. 부부는 바닷속에서 새 삶을 찾았다. 부부가 해남, 해녀가 된 것이다. 50세 동갑내기 부부 김형준·김은주 씨 이야기다.


“처음 정착할 때 제주에서 가장 ‘제주스럽게’ 살자고 다짐했어요. 나이 마흔 넘어 계획도 없이 단순했죠.”(김은주) 제주행을 제안한 건 부인 김은주 씨다. 잠시 쉬러 들른 제주에서 개에 물리는 사고를 당했고 그 핑계로 한두 달 더 머물게 된 게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가 됐다. 그는 “매일 놀고먹을 수 없어 귤을 따거나 당근을 캐고 식당에서 잡일을 도왔는데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2013년 홀로 제주로 내려왔다. 남편 김형준 씨가 내려온 건 그로부터 1년 뒤다.


김은주 씨는 제주 바다, 특히 해녀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마침 해녀체험학교가 개학해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발을 들였다. 프리다이빙 국제공인 자격증을 딸 만큼 물질에는 자신이 있었다. 공기통 없이 호흡만으로 잠수하는 프리다이빙은 해녀들의 물질과 가장 흡사한 레포츠이다. 4개월의 체험 과정이 끝나고 이참에 본격적으로 배워보자 싶어 이듬해 해녀양성과정에 등록했다.


“2015년 제주도에 처음으로 해녀양성과정이 생겼어요. 여자만 20명 신청받았는데, 제가 1기생으로 들어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주변에서 ‘에이, 육지 것(타지 사람)인데 설마 해녀 시켜주겠나’ 해서 반신반의했지만 한 우물만 파는 성격이라 될 때까지 해보자 했죠. 바다에서 물질을 해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적성에 딱 맞았죠.”(김은주) 2014년 한수풀해녀학교에 이어 2015년 법환해녀학교를 졸업한 그는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의 공천포에 정착해 해녀의 길로 들어섰다. 남편 김형준 씨는 3년 전부터 해남의 길을 준비해 1년 남짓 인턴 기간을 마치고 정식 해남이 됐다.


“남편이 제 후배예요. 하하. 정식으로 해녀가 되기 전에는 실제 거주하는 마을 어촌계에 허락을 받아 바다에서 해녀들과 작업을 해봐요. 그 안에서 신뢰가 쌓이면 어촌계 총회에 오를 자격이 주어지죠. 그게 바로 해녀 인턴 과정이에요. 어촌계에 들어가는 과정은 까다로워요. 총회에서 해녀 및 어촌계원의 만장일치가 있어야지만 들어갈 수 있죠. 단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해녀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어촌계원으로 받아들여지면, 수협 소속 조합원이 되고 도청에서 ‘해녀증’이 나와요. 최종적으로 제주도의 ‘해녀’로 등록됩니다.”


해녀 인준 과정도 까다롭지만 실전에서 해녀로 살아가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해녀학교가 체험 과정이라면, 바다는 실전이다. 실전에서는 경험만이 답이었다. “아무도 이렇다 저렇다 가르쳐주지 않아요. 직접 눈으로 보고 따라하면서 배워야 합니다. 어떨 땐 물질하고서 바다 위로 나와 보면 해녀들이 아무도 없어요. 저쪽 멀리 가서 물질하고 있는 거죠. 그럴 땐 잽싸게 따라가야 합니다. 눈칫밥으로 4년을 보냈어요.”(김은주)


부부는 껴안고 엉엉 울기도 했다 

바닷속에도 룰이 있다. 해녀들은 바다에서 이동할 때 일렬로 이동하는데, 낮은 바다부터 깊은 바다까지 상·중·하 군으로 나눠 들어간다. 수심 5m 미만은 하군, 10m 내외는 중군, 15m 이상은 상군으로 나뉜다. 잘하는 사람이 초보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배려다. 부부가 상군이 다니는 깊은 바다에 들어가기 시작한 건 2016년부터다. “지난해 깊은 바다에서 둘이 물질을 하고 있는데 옆 동네 해녀들이 우리를 보며 손을 자꾸 흔들어요. 뭔가 싶어 보니 방파제에서 너무 멀어진 거예요. 물때가 바뀐 거예요. 겁이 덜컥 났어요. 둘이 헤엄쳐 돌아가는데도 물살 때문에 점점 바다로 밀려났죠. 몇 시간 잡은 소라 다 버리고 테왁(해녀들이 작업할 때 사용하는 부력 도구)을 튜브 삼아 헤엄쳐 돌아왔어요. 뭍으로 올라와서 둘이 껴안고 엉엉 울었죠.”(김형준)


어쩌면 서로를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부부는 겁이 덜컥 났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한 달 반을 바다에 못 나갔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한 아찔한 경험이었다. 해녀는 바닷속에서 미역이나 닻줄의 방향을 보며 만조와 간조, 즉 물때를 읽는다. 미역이 한 방향으로 누웠다가 꼿꼿하게 서면 물때가 바뀐다는 신호다. 그걸 알아채기까지 부부에게는 1년이 넘게 걸렸다.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모두 경험과 ‘눈치’로 배운 실전 노하우다.


김은주 씨의 잠수 모자에는 앙증맞은 주황색 불가사리가 달려 있다. 하도 바다 구경한다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니 마을 해녀들이 ‘막내’가 안전하게 물질을 잘하는지 위치 파악하려고 붙였다고 한다. “나이 든 해녀들이 저를 아기 해녀라고 해요. ‘아가야’ 하고 부르시죠. 해녀 공동체로 들어가기 위해 누가 시키기 전에 먼저 하려고 노력했어요. 제일 먼저 가서 보일러 데우고, 집기를 정리했죠. 가끔은 등 때도 밀어 드리고요. 끝나고 목욕탕 뒷정리도 다 하고요. 그랬더니 다들 아껴줘요. 저보고 ‘요망지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처음에는 ‘엉큼하다’는 말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말로 똘똘하고 야무지다는 표현이었죠.”


김은주 씨가 입는 잠수복도 89세 할머니가 선물한 옷이다. 김형준 씨의 잠수복은 어촌계장이 물려줬다. “해녀가 되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그런지 처음 받은 잠수복이 특별했던 것 같아요.”이제 부부는 물 위로 터져 나오는 해녀들의 ‘숨비소리’만 들어도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숨비소리란 해녀들이 물질을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와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를 말한다.


“저도 올해 처음으로 숨비소리가 터졌어요. 그게 아무나 나오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는 흉내 내고 싶어서 휘파람을 불기도 했죠. 체력적으로 지치고 숨이 막힐 때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부터 올라와서 덩어리 터지듯이 올라오는데, 그게 숨비소리였죠. 신기하게도 숨이 터지고 나니 체기 가라앉듯이 편안해졌어요.”(김형준)


우리는 아직 배울 게 많은데… 

해녀는 마을마다 다르지만 보통 한 달에 2번, 약 10일 동안 보름 물때에 맞춰 바다에 나간다. 연중 7~8월은 산란기라 소라 채취가 금지되어 있다. 또 감귤 수확이 시작되는 11월에는 일손이 부족해 일찍 일을 접는다. 그러다 보니 1년 동안 8개월 정도 물에 나가는 게 전부. 아직도 배워야 할 과정이 많은데 시간은 부족하고 점점 물질하는 해녀가 줄어드니 부부의 마음은 급하기만 하다. 현장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게 해녀의 일이다.


“작년(2016년)에는 해녀 11명이 물에 나갔는데 연세가 많아 점점 체력적으로 힘들다 보니 올해(2017년)는 5~6명이 물에 들어갔어요. 우리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데 현장에서 어르신들이 점점 사라지는 거죠. 항상 건강하게 더 오래 우리랑 같이 물질하자고 해요. 우리 마을에 89세의 해녀가 있는데, 건강이 안 좋아 더는 물에 못 들어가면서도 물때만 되면 잠수복을 입고 나오세요. 탈의장 앞이 집이라 항상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계시죠. 그분이 늘 지키던 자리에서 안 보인다 생각하면 울컥해져요.”(김형준)


어렵게 얻은 해녀라는 직업은 부부에게 남다른 자부심이면서 또한 책임감의 무게로 다가온다. 부부는 더 늦기 전에 ‘해녀’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다고 말한다. “해녀의 길을 지켜나가면서 남들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해녀 문화는 언제 사라질지 몰라요. 물론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할 힘은 없지만, 엉킨 실타래의 실 끝을 찾아주는 역할을 하자고 의기투합했어요. 제주도가 좋아서 왔는데, 이제는 제주도도 점점 변해가는 게 눈에 보여요. 제주의 독특한 문화인 돌담도 점점 사라지고 있잖아요. 우리 마을의 해녀 모습만이라도 지켜내고 싶어요.”(김은주)


3년 전부터 부부는 매해 바자회를 열고 생활이 어려운 해녀들을 돕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7기 친구들과 마을 청년회 등도 뜻을 함께했다. 그렇게 2016년 5명, 지난해는 수협에 기금을 기탁해 10명의 어르신을 도왔다. 김형준 씨는 디자이너의 능력을 살려 해녀를 콘텐츠화하는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해녀의 노동 가치와 새로운 모습을 콘텐츠로 만들고 싶어요. 그래야 젊은 해녀가 노크해 올 테니까요. 여태까지 해녀의 콘텐츠를 다룬 사람들은 해녀가 아니었어요. 해녀 스스로가 콘텐츠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반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김형준)


최근에는 해녀를 테마로 한 장편 만화를 그리고 있다. 3년 동안 스토리를 썼고 매일 밤 그림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김은주 씨는 최근 해녀를 주제로 산문집을 썼다. 해녀가 되기로 마음먹으면서부터 해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일상을 엮었다. 책 제목은 그녀의 애칭이기도 한 《명랑해녀》다.


“명랑해녀는 신랑이 만들어준 이름이에요. 바다를 사랑하는 해녀의 마음을 담아 명랑하게 살자 해서 지은 이름이에요. 미래를 담은 말이죠. 실제로도 즐겁게 일해요. 그동안 해녀라고 하면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의 고된 노동’으로만 보였어요. 사실 해녀 일은 참 고되고 힘들어요. 누가 시켜서는 못 하는 일이죠. 하지만 실제로 살아본 해녀의 삶은 고된 만큼 또 즐겁거든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기왕이면 즐겁게 하자. 명랑하게 가자. 앞으로의 바람을 담은 말이기도 합니다.”


글·사진 jobsN 서경리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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