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다 커가 극찬한 한국산 '사악한 고데기'의 정체

조회수 2020. 9. 22. 14: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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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쓰면 다른 제품 못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한국산 고데기
1995년 고데기 OEM 기업으로 시작
2008년 자체 고데기 브랜드 '글램팜' 만들어
세계적으로 고데기 시장 키운 주인공

“판매된 제품 모두 회수합시다.”


2009년 초, 서울 묵동 언일전자 회의실. 이 회사 조옥남(74) 대표는 고데기 불량 제품 1건이 접수됐다는 보고를 받은 뒤, 전량 리콜을 지시했다.


고데기 주문자위탁생산(OEM)을 하던 언일전자는 2008년 9월 처음으로 자체 브랜드(글램팜)를 출시해 4개월여만에 판매량 1만개를 돌파하는 등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당황한 임원들은 “제품 회수에 비용이 많이 들고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말렸다. 하지만 조 대표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불량 원인이 내부 회로 고장이라고 했죠? 외부 손상 등 단순 과실이면 몰라도 내부 회로 문제라면 신중해야 합니다. 현재 정상인 제품들도 얼마든지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리스크가 제로(0)라고 할 수 없어요. 나중에 사태가 커지면 손 쓸 수 없게 됩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이 회사 조완수(41) 전무는 "대부분의 임직원이 반대했고, 고객들도 '지금 잘 쓰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못마땅해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가 됐다. 조 전무는 "'장인정신'으로 만든다는 생각이 직원에게는 자부심을, 고객에게는 신뢰를 줬다"며 "당시의 선제적인 리콜은 회사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세계 '고데기' 시장 장악한 언일전자 

일반인은 '언일전자'라는 사명과 '글램팜'이라는 제품명을 잘 모른다. 하지만 헤어디자이너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헤어디자이너 20만명 중 70~80%는 언일전자의 고데기를 쓴다.


고데기는 ‘인두’를 의미하는 일본어 ‘코떼(鏝)’에서 온 말로 표준어는 아니다. 우리말로는 ‘전기머리인두’라고 한다.


1995년 문을 연 언일전자는 1997년 고데기 OEM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2000만개의 고데기를 팔았다. 미국 헤어브랜드 CHI(ceramic hair iron), 영국 헤어브랜드 GHD(good hair day)의 고데기를 언일전자가 만들었다. 두 브랜드가 세계 전문가용 고데기 시장점유율 80% 이상을 차지한다.


2004년 영국 왕실은 스페인 왕자 결혼식에 언일전자에서 OEM한 고데기를 선물로 보냈다. 이를 써보고 감동한 스페인 왕실에서 해당 브랜드 회사에 편지를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 팝스타 마돈나, 모델 미란다커, 영국 왕세자비 케이트 미들턴이 언일전자가 OEM한 고데기를 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언일전자는 2008년부터 자체 브랜드 '글램팜'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 현재 미국·유럽·일본·홍콩·싱가포르·남아프리카공화국 등 20개 넘는 국가에 수출한다.


회사 직원수는 80명. 서울 묵동에 있는 600평짜리 공장에서 제품을 만든다. 2016년 매출액은 205억원, 영업이익은 21억원이다. 조완수 전무는 이 회사의 실무 전반을 책임지고 미국 법인장을 맡고 있다. 그는 조옥남 대표의 아들이다. 기기 부품 사업을 했던 아버지를 도와 7세 때부터 납땜을 하고 부품을 조립했다. 서울시립대 화학공학과 졸업 후 2001년 입사했다. 회사의 미래를 이끌어 갈 그에게 언일전자의 경쟁력과 성공 비결을 물었다. 

출처: jobsN
조완수 전무.

"헤어디자이너에게 먼저 인정받자" 

“고객들 상품평을 보면 ‘사악한 고데기’라는 말을 합니다.”


‘사악하다’는 말은 ‘가격이 비싼데 제품이 좋아서 안사고는 못베긴다’는 뜻이다. 글램팜 가격은 20만원대. 전문가용 제품 중에서도 비싼편이다. 조 전무는 “20여년간 제품을 개발하면서 얻은 노하우와 기술이 집약됐다”며 “저렴한 고데기를 여러개 사는 것 보다 뛰어난 제품 하나를 오래 쓰는 게 낫지 않나”고 말했다.


글램팜은 출시 때부터 높은 단가때문에 일반인보다는 헤어디자이너를 타깃으로 삼았다. “하루에도 수십번 고데기를 꼈다 켜는 헤어디자이너들이 저희 제품을 써보면 고장도 없고 성능도 우수해서 다른 제품은 쓰지 못한다고 말해요. 헤어 전문가들에게 인정 받으면 소비자는 자연스럽게 찾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고데기를 만들 때 중요한 부분은 ‘열판’이다. 언일전자는 타사와 차별화되는 이 부분의 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머리카락 표면은 ‘큐티클’이라는 세포가 감싸고 있습니다. 열이나 화학약품에 쉽게 상해요. 고데기는 열로 머리칼 모양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머리카락에 손상을 줍니다. 그런데 열판이 부드럽지 못하면 고데기가 머리카락을 스치면서 큐티클을 더 많이 상하게 합니다.”


고데기가 머리를 스칠 때마다 ‘뜯긴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머리카락이 닿는 열판을 알루미늄 위에 도금해 만들어, 표면이 쉽게 벗겨지기 때문이다. 지금 대부분 고데기 회사는 열판을 세라믹으로 코팅한다. 세라믹은 마찰에 강해 벗겨지지 않고 색도 변하지 않는다. 이 세라믹 코팅 기술은 1999년 언일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출처: 언일전자 제공
글램팜 대표제품 'GP201'.

버튼처럼 열판이 살짝 들어가는 ‘쿠션’ 기능도 개발했다. 고데기를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머리칼을 감쌀 수 있다. 몸체를 둥글게 만들어 머리칼을 감아 웨이브 모양을 낼 수 있게 만든 것도 언일전자가 처음이다.


열판의 온도를 올리는 ‘온도 조절 시스템’도 핵심 기술 중 하나다. 타사 제품은 160~180도에 다다르기까지 1분~1분30초가 걸린다. 언일전자 고데기는 25~30초 안에 최고 온도에 오른다. “최근에는 시간을 8초로 줄였습니다. 고데기를 켜고 빗질 몇 번 한 뒤 바로 쓸 수 있어요.”


언일전자 고데기를 사용하면 머리카락을 여러 번 펴지 않아도 되는 장점도 있다. “저희 제품은 머리카락에 뺏긴 온도를 빨리 복원합니다. 온도 변화는 고데기에 달린 화면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최근 언일전자의 새로 나온 고데기에는 버튼이 없다. 집게 부분을 한번 맞부딪치면 켜지고 연속해 3번 누르면 온도가 올라간다. 1분 이상 그대로 두면 자동으로 꺼진다. “해외에서는 카페트를 많이 써서 고데기 전원을 켜두고 나갔다 화재가 발생한 경우가 많은데,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개발한 제품입니다.” 

출처: jobsN
“제가 어릴적 아버지가 하시던 일은 사업보다는 가내수공업에 가까웠어요. 방학에도 일하고, 학원에도 못갔죠. 사춘기부터는 아버지를 도와 일하는 게 지겹고 싫었습니다. 대학 졸업만 하면 탈출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어느날 새벽 2시에 일을 끝내고 집에 가는데 대표께서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평소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 분이 아닌데, 진심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하셨을까 싶었죠. 그 말 한마디가 가슴에 꽂혔습니다."

혁신을 만든 집념·열정

언일전자는 원래 조종사용 헤드셋을 만드는 기업이었다. 30평짜리 공장이 전부였다. 1995년 말 미국 유명 헤어브랜드 CHI로부터 “일본 고데기보다 좋게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처음 받았다. 언일전자는 예열 시간을 줄이는 등 일부 기술을 개선했지만 ‘모방 제품’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일본 기성 제품 디자인을 보고 베꼈고 부품도 수입했다. “‘고데기’는 한가지 모양이뿐이었고 기능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시장 자체가 멈춰 있었죠.”


조옥남 대표는 투자만 한다면 충분히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시장이라 봤다. 1998년 코드 끝에 달려있던 온도 조절기를 몸체에 넣었다. 무엇보다 머리칼을 뜯는 열판을 매끈하게 만드는 일이 첫번째 과제였다. 표면이 쉽게 벗겨지지 않는 재료로 ‘세라믹’을 택했다. 건축물 외벽이나 전동차 표면에 쓰는 특수 재료였다. 

출처: 미란다커 인스타그램
최근 미란다커는 인스타그램에 직접 쓰는 고데기 사진을 찍어 올린 적이 있다. 언일전자가 지금 OEM을 하고 있는 브랜드(Harry josh)의 고데기다.

“국내에 세라믹 도료를 공급하는 회사가 딱 2군데 있었어요. 한곳에서는 거절 당했고, 다른 한곳도 안해준다는 걸 졸졸 따라다니면서 부탁했습니다. 세라믹 분말을 반죽하고, 숙성해 도료로 만들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죠. 세라믹도 여러 종류가 있고, 온도나 시간에 민감했습니다.”


세라믹 코팅 기술에만 40억원을 투자했고 1999년 상용화까지 2년이 걸렸다. 코팅 자동화 기술도 도입했다. “도료를 코팅할 때 사람이 스프레이로 뿌려 균일하지 않았어요. 스프레이스 부스 안에서 균일하게 세라믹 코팅을 뿌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출처: 언일전자 제공
건강한 머리칼을 가진 두 명의 20대 여성을 조사한 결과, 글램팜과 경쟁사 A사 제품, B가 제품을 4주 동안 매일 사용한 결과다.

고데기를 오래 쓰다보면 손에 땀이 찬다. 땀을 흡수할 수 있는 ‘레진’ 소재로 몸체를 만들었다. “금형구조 상 한계가 있어서 쉽지 않았어요. 당시 1kg에 6000원이었는데 30톤을 사다 계속 테스트를 했습니다.”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계약 물량이 급증했다. 2000년 영국 헤어브랜드 GHD가 사업을 시작할 때 언일전자를 파트너로 점찍었다. CHI와 GHD를 합쳐 한해 160만~170만개를 팔았다. 2001년 20억원대이던 회사 매출이 2002년에는 1년 만에 5배가 됐다. 2006년 매출은 634억원으로 정점을 찍었다.

OEM 사업의 한계···자체 브랜드 만들어

하지만 OEM 사업은 한계에 부딪혔다. 유명 배우와 모델, 영국·스페인 왕실에서 언일전자가 만든 고데기를 쓰지만 ‘언일전자’라는 이름을 내세울 수 없었다.


“아무리 성장해도 누군가의 브랜드를 판매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기술을 개발해도 특허를 내기 어려웠습니다. 거래처에서 갑자기 계약을 하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요. 실제 가장 큰 거래처에서 중국으로 공장을 바꾸겠다고 예고없이 통보했습니다.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2008년 내놓은 자체 브랜드 ‘글램팜’은 '매력적(GLAM)으로 만드는 손(PALM)'이라는 뜻이다. 이제는 ‘글램팜’만으로도 국내외에서 인지도가 쌓였다. 

'고데기'하면 글램팜을 떠올리기를

조 전무는 언일전자가 지금과 같은 명성을 쌓기까지 ‘타이밍’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디자인·기술은 당연하고, 시대 상황까지 맞아줘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스북의 성공을 말할 때도 기술이나 능력을 말하진 않습니다. 그 이전에 페이스북과 유사한 서비스는 이미 무수히 많았어요. 스티브 잡스가 누구보다 먼저 애플이나 아이튠즈를 생각해낸 것도 아니죠. 타이밍을 놓친 많은 기업들이 교훈을 보여주죠. 한편으론 좋은 제품을 시장에 너무 빨리 내놔도 힘듭니다. 중소기업은 소비자를 교육하기 쉽지 않아요. 삼성이나 애플에서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면 금방 소비자가 적응하겠지만 중소기업은 힘듭니다. ”


조 전무는 앞으로 ‘글램팜’의 가치와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주력할 생각이다. 기업이 오래가기 위해선 ‘브랜딩’이 중요하다. “저희는 명품 고데기의 대명사가 되고 싶습니다. ‘고급백’하면 샤넬을 떠올리고, 명품 자동차의 대명사는 벤츠입니다. 샤넬과 벤츠는 기술력과 브랜딩 모두 뛰어납니다. 저희도 믿고 쓰는 고데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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