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제작 실패로 빚더미→방탄소년단도 거침없이 평가하는 전문가

조회수 2020. 9. 18. 15: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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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라는 '요술'에 빠진지 40년, 요즘은 '예능계 블루칩'으로 급부상? 음악평론가 임진모의 '앙코르 내 인생'
제 나이에 아이돌 노래 줄줄 꿰는 분 있을까요?
중3 겨울방학 때부터 음악평론가 꿈꿔
기자, 음반제작자 거쳐 20년 넘게 전업 음악평론가로
본업 충실하기 위해 예능 출연은 자제

“너 이걸 직업이라고 생각하냐?”


1975년 서울 여의도고. 1학년생 임진모는 교무실에 끌려갔다. 장래희망란에 ‘음악평론가’를 적었다는 이유로. 임진모의 고등학교 입학 성적은 반 1등이었다. 대답 못하고 쭈뼛거리던 제자에게 선생님은 타이르듯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음악하면 가난해져 임마.”


그로부터 40년이 지났다. 음악평론가 임진모(58)는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하진 않다. 작가, 교수, 에세이스트, 방송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대중음악을 논할 때, 임진모를 빼고 얘기하면 어딘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반항심 가득하던 시절에 선생님 얘기가 귀에 들어왔겠어요? 오기가 생겨서 더 미친듯이 음악을 들었죠.” 

출처: jobsN
음악평론가 임진모씨

가수도 작곡가도 아닌 음악평론가 

음악평론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중3 겨울방학 때. 고등학교 배치를 기다리며 하루 종일 라디오 켜고 팝송을 들었다. 비틀즈, 카펜터스, 롤링스톤즈, 핑크 플로이드, 엘튼 존의 음악을 들으며 “이게 인간이 만든 노래인가” 생각했다. 가요 중에서는 특히 신중현과 이장희의 노래에 정신이 홀렸다.


“‘마법을 부리지 않고서는 그런 멜로디와 전개가 나올 수 없다. 이건 예술이 아니라 요술이구나’ 생각했어요. 팝송에 대한 강한 매력을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왜 가수도, 작곡가도 아닌 음악평론가였을까.


“당시 듣던 음악은 경외와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요술 같은 음악을 나 같은 범인(凡人)이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훌륭한 음악들을 좋은 글과 말로 사람들에게 전달하자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 거죠.”

출처: jobsN
음악평론가 임진모씨

고2때부터는 음악을 듣고 난 후의 느낌을 틈틈이 글로 쓰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는 공책에 비틀즈, 롤링스톤즈의 노래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적었다. 팝송을 많이 틀어주는 AFKN(주한미군방송)을 들으려고 라디오를 옆에 달고 살았다. 용돈을 모아 LP판을 샀다. 군대 갈 때까지 모은 LP판이 5000장이 넘었다. LP 한 장에 30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경기도 부천에서 유리가게를 했던 부모님은 공부 잘하는 아들이 판·검사가 아니라 난데없이 음악평론가가 되겠다고 하자 ‘당연히’ 반대했다. 아들의 의지를 그 어떤 것으로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다행히 ‘결사 반대’까지 하진 않았다.


“아버지한테 음악평론가 하겠다고 했다가 ‘미친놈’이란 말을 들었어요. 대학 간 후에도 계속 그 꿈을 버리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고요. 그래도 1970~1980년대에는 낭만같은게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응원까지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방치’는 해주셨어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처: EBS 제공
라디오 방송에 출연중인 임진모씨

해외 음악을 접하는 통로가 된 기자시절

대학 졸업 전인 1984년 10월 경향신문에 입사한 임진모는 6년7개월간 기자로 일했다. 취재 분야는 음악이었다. 당장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 동시에 최신 해외 음악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혼자 구하기 힘든 해외 유명 음악 잡지들을 회사에서 읽으며 내공을 쌓았다. 서른 둘이 되던 1991년 5월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다.


“당시만 해도 서른 둘이면 적은 나이가 아니었어요. 어차피 저는 음악평론가 아닌 인생은 아무 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늦출 수 없었습니다.”


애 둘 딸린 가장에게 당장 수입이 없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실컷 음악을 듣고, 음악 관련 책과 글을 쓰며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살 돈이 필요했다. 어쩔 수없이 돈을 벌기 위해 음반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음반 3개가 잇따라 실패하면서 1년여만에 3억원 가까운 빚만 떠안았다.


다행히 1993년 ‘인공위성’이라는 아카펠라 그룹이 1집 타이틀곡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로 대박을 치면서 빚을 모두 갚았다. 1집 앨범은 50만장 이상 팔렸다. 인공위성의 성공으로 음반 제작자로서 탄탄한 앞 날을 열어갈 수 있었지만, 그는 고집을 부렸다.


‘음악평론가의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절대.’

1994년부터는 전업 음악평론가로 활동했다. 음악 관련 책을 쓰고, 잡지에 글을 싣고, 라디오 방송 출연을 했다.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1993년),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1994년), ‘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1996년)과 같은 스테디셀러가 줄줄이 나왔다.


1997년쯤부터는 강연 요청이 밀려들었다. 요즘도 한 달에 많게는 20번 넘게 강연을 나간다. 음악 관련 단체는 물론 대학과 기업, 공공기관에서도 강연 요청이 쇄도한다.

출처: 조선일보 DB
2011년 9월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리오갤러리. 임진모씨가 수강생들에게 한국 대중음악사(史)를 풀어놓고 있다.

글에 죽고, 글에 사는 남자

강연과 방송이 그의 주(主)수입원이다. 그러나 임진모는 음악평론가의 본령(本領)이 ‘글’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포기할 수 없다. 글에 대한 욕심이 어마어마하다. 한 달 평균 7~8개의 글을 꼭 쓴다. 강연과 방송 섭외는 셀 수없이 많이 거절했다. 시간이 없어서. 하지만 원고 요청은 무조건 받는다. 시간이 없어도.


글은 보통 200자 원고지 17~18매를 쓴다. 글 쓸 때는 원칙이 있다. 30년 넘게 글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내지 고집 같은 것이다.


‘단숨에 최대한 빨리 쓴다.’


글 한 편 쓸 때 절대 3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거칠게 원문을 탈고하면, 바로 수정에 들어간다. 딱 두 가지만 본다. 어미가 다양하게 바뀌고 있는가, 겹치는 단어가 있는가. 


글에 쏟아 붓는 감정을 끊지 않고 쭉 이어가고 싶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왜 그렇게 빨리 쓰시냐”고 했더니 대답이 의외다.


“글 감옥에서 빨리 해방되고 싶어서요. 글 마감을 빨리 안 하면 하루 종일 거기에 얽매여서 글이 나를 지배해요. 글 쓰는 게 너무 좋은데, 쓰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너무 사랑하는 일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글쓰기는 음악평론가 임진모를 늘 긴장하게 해요. 글 안 쓰면 녹슨다는 느낌이 들어요. 돈 많이 벌고 싶으면, 강연과 방송이 쉽죠. 그렇지만 돈이 전부가 아녜요.” 

출처: /조선일보 DB·jobsN

‘다독’(多讀)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임진모도 예외가 아니다. 많이 읽을 때는 한 달에 10권도 읽지만, 요즘은 바빠서 많이 줄었다. 그래도 3~4권은 반드시 읽는다.


그의 가방에는 ‘레트로 마니아’라는 책이 들어 있었다. 영국 출신의 음악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가 쓴 책이다. 대중음악을 필터로 삼아 문화 전반에 만연한 ‘레트로’ 문화를 처음으로 철저히 파헤쳤다. 책에는 여러 군데 밑줄이 있고, 낡아 보였다.


“이 책을 10번은 읽었어요. 좋은 책은 한 번 보는 걸로 끝내지 않고, 들고 다니면서 틈 날 때마다 여러 번 봅니다.” 

익명성을 사랑하는 남자 

지금의 임진모를 만든 것은 LP와 라디오였지만,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최신 가요도 빼놓지 않고 듣는다. 인기 아이돌과 래퍼들의 노래를 줄줄이 꿰고 있다. 트와이스, 지코, 비와이, 방탄소년단, 하이라이트 등의 젊은 가수를 대부분 안다. 당연히 그들 음악에 대한 평론도 한다. 

출처: MBC 방송화면 캡처
MBC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임진모씨

임진모는 최근 MBC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첫 예능 출연임에도 거침없는 입담을 과시하며, “예능계 블루칩이 떴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으로 예능에서 자주 볼 수 있냐고 물었더니 “내가 은근히 익명성을 사랑합니다. 유명해지는 거 싫어요”라고 발을 뺀다.


7년쯤 전 우연히 그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서울 6호선 지하철이었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겨우 중심을 잡으며, 빛 바랜 책을 읽는 모습이었다. 익명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라는 직업, 계속되기 어려울 것” 

임진모는 음악평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시대 상황때문이었다”고 말한다. 1970~1990년대는 한국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얼마든지 취업할 수 있었다. 회사를 골라 가던 시절이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애 딸린 아버지가 뒤도 안 돌아보고 회사를 때려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믿음이 있어서였다.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밥 못 먹고 살겠어’라는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깔려있었다.


“지금 우리 시대의 키워드는 ‘고용 불안’ 같아요. 요즘처럼 먹고 살기 어렵고, 취업 힘들고, 패자부활전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았다면 내가 자아실현 한답시고 월급 빵빵한 회사를 호기롭게 때려칠 수 있었을까요? 고등학교 때부터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전문직에 대한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이런 것들이 다 불안해서잖아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큰일나겠다’ 이런 생각들. 젊은 사람들이 자꾸 안정성만 추구하게 되고.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전업 평론가를 하겠다고 나오는 사람이 있겠어요. 불쌍해요, 요즘 청년들이.”


글 jobsN 김지섭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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