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수도사들이 만드는 세계 최고의 맥주

조회수 2018. 6. 22. 23: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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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rewbokeh

‘웨스트블레트렌 12(Westvleteren 12)’는 세계 최고의 맥주로 손꼽힌다. 벨기에 성 식스투스 수도원(Saint Sixtus Abbey)에서 트라피스트회(Trappist) 수도사들이 만드는 맥주다. 이 수도원에서 맥주 양조가 시작된 게 1838년이니 올해로 딱 180년이 됐다. 수도원은 웨스트블레트렌 12에 더해 ‘웨스트블레트렌 8’과 ‘웨스트블레트렌 블론드 6’ 세 가지 맥주를 만들지만 이 중 가장 진한 12에 대한 평이 제일 좋다.  

출처: www.westvleterenbeers.com
벨기에 성 식스투스 수도원

그런데 그렇게 맛이 좋다는 이 맥주를 실제로 맛보는 호사를 누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소량만 생산하기 때문이다. 1년에 12만6000 갤론(약 47만7000 리터)만 생산한다. 1946년부터 그래왔다. 다른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 만드는 맥주 중 비교적 유명하며 국내 수입도 되는 시메이(Chimay)가 연 3200만 갤론을 생산되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적은 양이다. 그마저도 수도원 현장 판매만 한다.


수도원은 1년에 70일만 맥주를 만든다. 양조에 투입되는 수도사는 모두 5명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병입을 하는 날에는 5명이 추가로 일을 한다. 상당히 한가해 보이는 양조 과정과는 달리 이 맥주를 구하려는 사람은 차고 넘친다. 맛볼 수 있는 방법은 2가지다. 수도원에 직접 가서 한 궤짝(24병)을 사거나 수도원 바로 앞 카페(De Vrede café)에서 마시는 거다. 레이블도 붙어 있지 않은 병은 하나에 2달러가 채 안 된다고 한다. 생각보다는 비싸지 않은 금액이다. 

출처: Westvleteren 12 페이스북
웨스트블레트렌 맥주

세계 최고의 맥주에서 배우는 워라벨

수도원은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는데 워낙 시골이라 찾기가 쉽지는 않다. 버스 타고 갈 생각은 접는 게 좋다. 여러 번 갈아타야 해서 무려 9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궤짝을 사려면 60일 전에 전화 예약을 해야 하는데 시간당 최대 8만5000번의 전화가 걸려올 정도로 통화하기가 어렵다. 예약할 때는 자동차 번호판을 알려줘야 한다. 해당 차량을 몰고 가면 한 궤짝을 살 수 있다. 같은 차로는 60일 안에는 다시 예약을 하지 못한다. 수도원은 또 맥주 재판매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맛도 맛이지만 희소성이 맥주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준 건 부인할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출처: 국제트라피스트협회
양조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사

이쯤 되면 도대체 왜 생산량을 늘리지 않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인기가 많으면 생산량을 늘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버는 것이 자본주의 시대에 상식적인 이치 아닐까. 이에 대해 수도사들은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맥주를 판매할 뿐이다. 맥주를 팔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라고 답한다. 자신들은 맥주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수도사이며 수도원을 운영하면서 수도사로 살기 위해 맥주를 만들어 팔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워라벨(Work-Life Balance). 개인의 일과 생활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이 용어에 요즘 모두가 관심을 기울인다. 기업 대표들이 직접 나서서 ‘칼퇴근’을 종용하고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업무 관련 메시지를 보내지 말자는 얘기도 나온다. 많은 기업들이 워라벨을 위한 많은 조치와 아이디어를 내놓고 실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 아쉬운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궁극적으로는 회사라는 곳이 친목단체가 아니라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하는 조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Westvleteren 12 페이스북
벨기에 성 식스투스 수도원 수도사들

여러 제도적인 장치의 도입과 함께 바뀌어야 하는 건 개인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세계 최고의 맥주를 만드는 수도사들에게서 워라벨과 관련해 배울 점이 있다면 그건 이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맥주 제조가 주 업무가 아니고 수도사로 사는 것이 먼저라는 점을. 수도사들이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우리는 많은 이름을 가지고 산다. 직업인이면서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이고 아빠이자 남편이며 생활인이다. 이 중에서 무엇이 주가 돼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을 갖고 사는 것이 진정한 워라벨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워라벨이 기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적이라는 생각을 기업들이 버리는 것이다. 미국 프로농구 NBA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 중 한 명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선수들에게 농구 외의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정치적인 목소리를 많이 내는 걸로 유명한 그는 연습 팀을 나눌 때,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부시를 찍은 선수들을 한 팀으로 알 고어를 찍은 선수들을 다른 팀으로 하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 Gregg Popovich 페이스북
그렉 포포비치 감독(왼쪽)

또 정부의 세금 인상에 찬성 또는 반대하는 선수들로 팀을 나눈 적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농구만 해서 농구 말고는 잘 모르는 젊은 선수들에게 세상에는 농구 말고도 중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그가 감독이 된 이듬해부터 올해까지 스퍼스는 21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이 중 5번을 우승했다. 그의 믿음이 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어쩌면 명확한 정체성이 브랜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웨스트블레트렌 맥주의 희소성이 맥주 맛에 대한 평가를 끌어올렸듯이 말이다. 

필자 김선우

약력

-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인문지리학과 졸업

- 워싱턴대(시애틀) 경영학 석사

- 동아일보 기자

- 새로운 삶을 발견하기 위해 현재 미국 시애틀 근처 시골에서 작은 농장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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