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세에 처음으로 책 한 권 끝까지 읽었다'는 분 인사에 보람 느꼈죠"

조회수 2018. 5. 18. 22:4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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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학습자 위한 쉬운 책 만듭니다"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인터뷰

“40대 발달장애인 분이 ‘마흔 두 살에 처음으로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며 감사 편지를 보내 주신 적이 있어요. 그 때 정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피치마켓은 느린 학습자(발달장애인)들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곳이다. 어려운 단어를 쉽고 일상적인 단어로 대체하고 추상적 묘사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바꾸면 배우는 속도가 느린 발달장애인들도 얼마든지 책 한 권을 ‘완독’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출처: 피치마켓
피치마켓에서 펴낸 책들

피치마켓(Peach Market)이라는 이름이 독특하고 예쁜데 무슨 뜻인가요.


경제용어 ‘피치마켓’에서 따 온 이름입니다. 피치마켓은 레몬마켓의 반대말이에요. 판매자가 구매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게 레몬마켓이죠. 반면 피치마켓은 사람들 사이에 균등한 정보가 제공되는, 공정한 시장을 의미해요. 느린학습자들도 저희 피치마켓의 책을 보고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 ‘피치마켓’이라는 게 경제용어다 보니 일반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말이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피치마켓으로 정한 것도 있습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만드는 회사라고 해서 굳이 엄숙한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어요.

피치마켓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저희 피치마켓은 주로 ‘글 쓰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화작가, 언론사 기자, 잡지사 기자 등으로 일하던 분들이 책을 쓰고 계세요. 쉬운 글로 된 책을 한 달에 한 권 꼴로 펴내고 있어요. 처음에는 세계명작소설처럼 문학 분야에 편중돼 있었지만 지금은 창작소설, 청소년 자기계발서 등으로 출판 분야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발달장애인 청소년들과 함께 독서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1대 1 멘토-멘티 형태로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는 건데요. 멘토는 주로 대학생 분들이 하시고요. 학생들이 직접 피치마켓 도서관으로 오기도 하고 거리가 멀어 직접 오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온라인 독서활동도 합니다. 대학생 멘토는 일정한 교육 이수 뒤에 활동하고요. 요즘은 서울시 지원을 받아서 온라인 독서활동관련 자료도 만들고 있습니다.

출처: 피치마켓
책에 실린 삽화를 바탕으로 느린학습자 청소년에게 내용을 설명해 주는 멘토
출처: 피치마켓
대학생 멘토 교육현장. 일정 교육을 이수해야 피치마켓 멘토로 활동할 수 있다.

‘쉬운 책 만들기’라는 분야를 정해서 창업하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사실 피치마켓이 첫 직장은 아니고, 이전에는 UN환경계획에서 일했었습니다. 그러다 피치마켓을창업했는데 처음부터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제가 법학 전공이었는데 전부터 법학 서적같이 어려운 글에 대한 반감이 있었어요. 


이런 전문서적 말고도 보험 약관이라든지 약 복용 지시서라든지, 전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글들이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글이나 정보를 쉽게 풀어내는 데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출처: 피치마켓
책에 실린 수학적 내용을 자세하게 보충설명하고 있는 멘토

많은 청년들이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는데, 대표님은 ‘내 일’을 개척한다는 게 막막하거나 어렵지는 않으셨나요.


UN환경계획에서 일할 때 성과가 좋았어요. 1000만 원을 가지고 시작했던 사업이 10억 가치로 돌아올 정도로 잘 되기도 했었지요. 선배들보다 먼저 승진해서 팀장이 됐는데 거기는 직급이 세분화되어 있지 않고 전부 평사원에 팀장만 따로 있는 구조였어요. 후배였던 제가 팀장으로 승진하니 선배들이 단체로 직장을 떠나면서 팀 유지가 어려워질 정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직장을 나와서 ‘내 사업’을 시작하면서 슬럼프가 왔어요. 내가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이뤄 왔던 성과들이 오롯이 내 실력, 내 네임밸류 덕분이 아니라 회사의 네임밸류 덕분이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내가 잘났기 때문에 일이 잘 풀린 게 아니고 UN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큰 단체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다른 단체와 협상할 때도 쉬웠고 성과를 만드는 데 유리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제 회사를 나와서 온전히 내 힘으로만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오니까 정말 막막했어요.


또 큰 규모로 진행하는 사업, 예를 들면 아프리카 어디에 다리를 건설한다거나 하는 큰 사업 기획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작고 세세한 기획을 하는 게 힘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익숙하던 것’에서 벗어나는 데 오래 걸렸어요.


슬럼프를 탈출한 비결은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는 마음가짐이었어요. 마음가짐을 바꾸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들부터 조금씩 해 나가기 시작하니까 점점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



사업 시작하셨을 때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아산나눔재단, 아름다운가게, 도서문화재단 씨앗이 사회적경제 기업들을 카운셀링하고 지원하는데 그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있는 피치마켓 멤버들 중 절반 정도는 창업 때부터 같이 시작한 분들이라 든든하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교수님, 기업가 분들로부터도 사업 조언을 받았습니다.

피치마켓 운영하시면서 기억에 남았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씁쓸한 추억 같은 게 있는데요. 어디라고 이름을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모 공공기관에 사업 이야기를 하러 간 적 있었어요. 일단 찾아가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절차를 몰라서 지문인식으로 열리는 문 앞에서 한 시간 정도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직원이 나오기에 ‘여기 사무관 안 계시냐’고 대뜸 물었는데요. 누구를 먼저 찾아야 할 지 절차를 몰랐으니까요(웃음). 그 분은 제가 사무관을 찾으니까 상급기관에서 나온 사람인 줄 아셨나 봐요. 막 갑자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야기 하다 보니 상급기관 소속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신 거죠. 그래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듣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황당한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또 낙담했던 기억이 있는데… 피치마켓 사업으로 첫 책을 펴냈을 때 발달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상태라서 반응이 안 좋았었거든요. 그 때도 기운이 쭉 빠졌죠. 고민하다가 상암고등학교 최경희 선생님의 배려로 특수학급에서 1년간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들었어요. 아이들과 똑같이 등교해서 똑같이 수업 받고, 점심도 같이 먹고 숙제도 같이 하고요.


그렇게 1년 하고 나서 책을 만드니까 반응이 확 달라졌어요. 한 40대 발달장애인 분이 편지를 보내오셨는데, 나이 마흔 두 살에 처음으로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면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정말로 큰 보람을 느꼈어요.

말씀 듣다 보니 학교 교육에 피치마켓 책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향후 사업 방향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문학뿐만 아니라 비문학 쪽으로도 콘텐츠를 확대할 계획이고요. E북(전자도서)출판, 영상콘텐츠 제작도 할 생각입니다.


현재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한 국어수업 교재로 피치마켓에서 만든 책이 사용되고 있어요.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대화의 폭이 넓어졌다, 학생들 호기심이 많이 늘었다”는 반응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전에는 일상생활 이야기, 밥 뭐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이런 대화만 반복됐는데 아이들이 책을 읽기 시작하니까 대화소재가 확 늘어난 거죠.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구들과 대화거리가 다양해진다는 건 큰 의미가 있어요. 발달장애 학생 본인이 책 한 권을 다 읽었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도 크고요.

출처: 피치마켓

소셜벤처를 만들거나 소셜벤처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비단 소셜벤처뿐만 아니라 모든 직장이 다 그렇지만 그 어느 직장에서든 365일 즐거운 일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피치마켓에서는 아직 퇴사한 분이 없지만 다른 소셜벤처 분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서 야심차게 들어왔다가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느끼고 실망해서 나가는 분들이 꽤 있다고 해요. 


무슨 일을 하든, 어느 직장에 가서든 ‘꼭 해야 하지만 하기 싫고 귀찮고 재미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게 소셜벤처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또 일반 기업보다 입사가 쉬울 거라 여기고 너무 편하게 생각해서 지원하는 분들도 가끔 있는데 좋지 않아요. 다 보입니다.

출처: 피치마켓
피치마켓 북페스티벌 현장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일(JOB)’이란?


예전에 아름다운 가게 사업선발 면접 질문 중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저와 동료들은 정말 매일매일 즐겁게 일했는데 회사가 망했습니다. 모두들 행복하게 일했는데 왜 사업이 잘 안 됐을까요?> 


이 사례를 보고 나름의 답을 내놓는 건데요. 저는 “너무 즐겁기만 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좀 딱딱하고 요즘 시대와 안 맞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일이란 게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고 즐거운 일만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하다 보면 지루하고 고단한 시간과 즐거운 시간이 번갈아 가면서 찾아옵니다. 늘 즐거운 일이란 건 없어요. 지루하고 힘든, 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버티는 시간을 보내고 그 과정에서 내공을 쌓다 보면 보람찬 순간이 반짝 찾아오고 성과도 거둘 수 있습니다.


버티는 시간과 즐거운 시간을 번갈아 보내는 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기회가 옵니다. 버티면서 내공을 쌓았다면 그 기회를 잡을 확률도 올라가요. 못 잡았다 해도 너무 낙심하지 말고 또 다음번에 찾아올 기회를 기다리며 다시 버티는 거죠. 그러면서 성취해 가는 게 일이고 직업 아닐까 합니다.



이예리 기자 celset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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