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낡은 돌담집이 스타트업 만났더니..

조회수 2018. 5. 31. 11: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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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순동 빨간지붕집이 건네는 말
사진=다자요

서귀포 대천동 주민센터가 나에게 준 이름은 도순동 841-1번지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서치비(서씨네) 종손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 전까지 아들내미 도시로 보낸 할머니 혼자 살았는데, 돌아가셨어요. 나는 한동안 혼자 지냈습니다. 남들은 나를 빈집이라 불렀지요.

쓸쓸했습니다. 온기가 떨어진 낡은 집은 햇볕이 들어도 냉기가 가시지 않더군요. 모두가 잠든 밤에는, 폐가 같았습니다. 동네에 나처럼 혼자 된 집이 꽤 있었어요. 이중에선, 육지에서 온 새 주인을 맞은 곳도 있죠. 대체로 헐렸어요. 요즘 시대에는 나같이 생긴 집은 팔리지 않는대요. 키 크고 멋진 빌라가 들어섰습니다. 세련된 모습에 값이 올랐다지만 왠지 우리 동네 집 같진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사람이 찾아왔어요. 서울에서 살다 제주로 돌아온 아저씨래요. 할머니 아들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보니, 동네를 꽤나 잘 아는 사람 같았어요. 그런데 이 아저씨는 자기가 새 주인이 아니래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나를 길게 빌렸다네요.

그리곤 시끌벅적 여러 작업이 시작됐어요. 공사는 느리게 진행됐죠. 페인트를 칠하고 화장실을 뜯어내 욕실을 만들고, 밖으로 감귤나무가 그림처럼 보이도록 거실에 커다란 창을 냈어요.

제주 돌담집은 대체로 바닥이 낮아요. 바람이 많이 부는 환경에 맞춰진 구조예요. 이 공간을 갈라 바닥에 낮은 층을 내 방과 거실을 만들었어요. 가을에 시작한 작업은 겨울까지 이어졌고, 눈이 내리면 멈췄다 눈이 녹으면 다시 시작했어요. 아파트랑은 다른 공사였어요. 내 겉모습은 그대로 유지됐지만 속은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렇게 1년. 사계절이 지나고 나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겼어요. 나는 이제 도순돌담집, 도순동 빨간지붕집이라고 불립니다.

자, 이제 제가 얼마나 예뻐졌는지 보실래요?

겉모습은 예전 돌담집의 형태를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 놀러온 이들이 편하게 자연을 감상할 수 있게 했어요.  집을 고치던 사람들은 나처럼 모양이 바뀌는 것을 공간 재생이라고 불렀어요.

밤에는 이렇습니다. 어두운 골목에 전구 불빛이 반짝이는 게 사진 보단 눈으로 볼 때 더 예뻐요.

여기는 침실이고요,

여기는 주방입니다. 전반적으로 은은한 조명이 많이 비치되어 있어요.

문을 열면 바로 귤나무가 보입니다.

이집의 백미는 여기지요. 거실 창문을 열면 야외 욕조가 있습니다. 자연 한 가운데서,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고안했대요.

화장실은 특히 신경써서 꾸몄대요. 화장실이 깨끗해야 놀러온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다 간다고요.

사진=다자요

제 옆에는 파란지붕집도 있습니다. 저보다 먼저 예쁘게 변한 빈집이에요. 우리는 서로를 안거리, 밖거리라고 불렀어요. 제주에서 안채와 바깥채를 일컫는 이름이지요.

제게 놀러온 사람들은 새 소리에 눈을 뜨고 커피 한 잔 내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게 좋다고 합니다. 밤에는 낮은 조명을 켜놓고 음악을 들으며 고기를 구워 먹고요. 어둠이 더 짙게 내려오면 음악마저 끄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습니다. 며칠 전 들른 손님은 귤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가 제일 좋았다고 하네요. 휴대폰을 잠시 끄고 고요에 젖으면, 그대로 제주가 느껴진다고 합니다.

앞으로 친구도 늘거라고 했습니다. 매일 오는 사람이 바뀔 거래요. 어떤 날은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이 오기도 하고, 가족 단위로 놀러와 밥 지어 먹고 뒤뜰의 귤을 따며 놀다 가기도 하겠지요? 할머니와 성준이의 기억을 살릴 수 있으면서도 깨끗하고 예쁘게 바뀐 이 공간에 낯선 이들이 놀러와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것이 꽤 마음에 듭니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제주에 나같은 집들이 많아질거래요. 아파트가 아니라, 여기 사람과 환경에 길들여진 나같은 모습이 진짜 제주라고요. 원래 살던 사람이 떠난 빈집을 제주의 정취를 고스란히 남긴 새 집으로 바꿔 육지 친구들을 만들어주겠대요.

혼저옵서예. 나는 도순남로29번길 5, 빨간지붕집입니다.

공간재생 프로젝트란?

사진=남성준 다자요 대표

주민들이 떠나면서 남은 제주 시골의 빈집 2만5000채. 제주 출신 남성준 대표가 차린 스타트업 ‘다자요’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금한 돈을 바탕으로 제주의 빈집을 장기 임대해 인테리어한 후 관광객에 숙소를 제공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현재 도순동 빨간지붕 집과 파란지붕 집이 와디즈 펀딩 2억원 모금에 성공해 인테리어를 마쳤다. 아파트나 빌라가 들어서는 난개발보다, 제주를 찾는 사람이 지역의 정취를 그대로 느끼면서 편안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공간재생 빈집 프로젝트의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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