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독자는 읽어야 할 의무가 없다

조회수 2017. 6. 29. 21: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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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11. 권할 만한 번역 지침서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해외 양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반대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읽고 나면 번역서들이 달리 보일 겁니다.


오늘은 [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제11화 '권할 만한 번역 지침서'입니다.


번역 작업에 관한 좋은 책들을 소개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안목 높은 독자 입장에서도 관심이 갈 만한 것들입니다.


그중 인상적인 구절들도 인용했습니다. 번역에 관한 글들인데, 마치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번역이란 미지의 회로를 뚫는 작업이라고 말할 때가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번역가이고, 소통이란 좋은 번역의 다른 이름입니다.

번역은 기본적인 독해력과 사전만 있으면 할 수 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래도 번역 '공부'를 하면 좋은 번역을 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번역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이럴 땐 번역 지침서가 도움이 된다. 사실 내가 번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읽을 만한 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 ‘이 책을 진작 알았으면!’ 싶은 책이 곧잘 눈에 띈다. 데뷔 시절부터 지금까지 요긴하게 읽고서 책꽂이에 모셔놓은 책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본다.

*이희재, 『번역의 탄생』 (2009)


번역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단 한 권을 추천한다면 이 책이다. 번역 경력이 쌓이면서 슬슬 ‘나도 번역 지침서 하나 내볼까?’ 하는 마음이 든 적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굳이 내가 안 써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서는 영한사전에 없는 우리말 풀이와 접두사·접미사 활용, 가짜친구 등의 설명이 특히 요긴했다. 이 책에는 가슴에 새겨야 할 명언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 몇 개만 소개하면: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34쪽)


단순히 번역투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는 한국어로 같은 뜻을 얼마든지 정확하고 간결하게 나타낼 수 있는데 이런 질서까지 허물어뜨리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94쪽)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아직 뚫리지 않은 회로가 무궁무진합니다. 어떻게 보면 번역이란 그 미지의 회로를 뚫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157쪽)


영어에서 접속사가 중요한 까닭은 문장과 문장을 잇는 논리적 연결 고리가 접속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국어는... 접속사 대신 어미로 글의 논리 관계를 간결하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174쪽)


사소한 고유 명사까지 고스란히 살려주는 것은 한국 독자에게는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232쪽)


‘발코니’는 한국어이고 balcony는 영어입니다. ‘오렌지’는 한국어이고 orange는 영어입니다. 오렌지는 한국어니까 그냥 ‘오렌지’라고 말하면 되지 ‘어륀지’라고 혀를 꼬아서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233쪽)


철학서나 역사서, 사회과학서에는 딱딱한 개념을 담은 명사가 많습니다. 그런데 동사, 형용사, 부사까지 딱딱한 한자어를 남발하면 독자는 질립니다.(287쪽)


토박이말을 쓰는 까닭은 민족주의를 주장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머리에 잘 들어온다는 소박한 이유에서입니다.(290쪽)


맞춤법이 흐트러지면 형태소도 무너집니다.(321쪽)


번역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입말 실력이 아니라 글말 구사력입니다. 특히 원어보다는 번역어의 글말 실력이 좋아야 합니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영어 실력보다 한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소리입니다.(330쪽)


맥락 없이 날것으로 차음어를 불쑥 던져놓으면 이국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독자가 장벽(이질감)을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372쪽)

*이종인, 『번역은 글쓰기다』 (2014)


번역 강의를 할 때 이 책 제목을 늘 써먹는다. 말 그대로 번역은 글쓰기다. 번역을 잘하려면 글솜씨를 길러야 한다. 저자 이종인은 '번역가로 사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번역료까지 공개한다. (언뜻 듣기에 지금은 더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책에도 곱씹을 만한 문장이 많다.

원문에 너무 도취한 상황에서 번역을 하면, 원문 비슷한 번역문이 나온다. 원문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번역문은 곧 독자가 이해할 수 없거나 어색한 번역문이 되어버린다.(56쪽)


역자후기를 처음 쓰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대략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줄거리의 요약이고, 둘째는 개인적 상황의 진술이고, 마지막은 자기 지식의 과시이다. 줄거리 요약은 인문서든 소설이든 에세이든 절대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장편소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175쪽)


어떤 번역가는 텍스트 번역을 먼저 출판사에 제출하고 나서 한참 뒤, 그러니까 책이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에 역자후기를 황급히 써서 출판사에 건네준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이렇게 해본 적이 없고 텍스트를 완역하고 그 뒤에 반드시 역자후기를 붙여서 출판사에 주었다.(179쪽)


번역가는 원문의 디테일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하고 그것을 최대한 번역문 내에서 살리려고 애써야 한다. 때로는 디테일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189쪽)


글을 오래 많이 쓰려면 기억에만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상적 체험만으로 글을 쓰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지난번에 했던 얘기를 또 다시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반복은 아닐지라도 비슷한 분위기가 계속되어 그게 그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230쪽)


무슨 장르의 일이 되었든 나는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 책만 생각한다.(279쪽)

*윤영삼, 『갈등하는 번역』 (2015)


『번역의 탄생』 이후 더 나은 번역 지침서는 나오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는데,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지침서가 등장했다. 기존 번역가들이 감으로, 또는 나름의 주관으로 설명하는 것을 저자는 탄탄한 학술적 토대 위에서 체계적으로, 하지만 결코 난해하지 않게 설명한다. ‘이건 왜 이렇게 번역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속 시원히 해결해주는 책이다.

초보자와 경험자의 차이는 텍스트 감각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된다.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사람들, 번역을 많이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못된 글을 보고도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17쪽)


번역가는 이제 자신의 번역 선택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정당화할 줄 알아야 한다. 경험과 감感으로만 번역해서는 자신의 번역 선택을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독자를 설득할 수도 없다.(17쪽)


[어떤 번역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과격한 도약을 시도한다. 어쨌든 [그런 번역문은] 다른 번역문보다 한결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나쁜 습관이다. 문법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 억지로 꿰맞춰 번역을 해놓으면 나중에 편집자는 물론, 자기 자신도 오역을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35쪽)


독자에게는 의무가 없다. 읽기 싫은 글,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글, 재미없는 글, 읽을 가치가 없는 글은 굳이 시간 들여 (그리고 돈을 들여) 읽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저자든 번역자든, 자신의 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에게 쉽게 읽히는 글을 쓰는 것은 선택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습득해야 하는 생존 기술이다.(68~69쪽)


독자들은... 어휘 선택을 토대로 이 글이 읽을 만한 내용인지,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내용인지 판단한다. 논조가 이미 편향되어 있는 글은 대개 그 결론이 뻔해서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76쪽)

*모나 베이커, 『말 바꾸기』 (2005) 


『갈등하는 번역』에 다루는 세 가지 문제(단어 수준의 번역 문제들, 문장 수준의 번역 문제들, 담화 수준의 번역 문제들)는 번역학에서 ‘등가equivalence’라는 개념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분야다. 『말 바꾸기』에서는 단어 차원의 등가, 연어와 관용구 차원의 등가, 문법 차원의 등가, 텍스트 차원의 등가, 화용론적 차원의 등가를 다룬다. 번역 초보자들은 의미를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 번역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번역은 여러 층위가 겹치는 작업이며 각각의 층위에서 번역가의 선택이 개입한다.

*이강룡,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2014)


웬만큼 번역에 자신이 생겼을 때, 또는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읽어보면 좋은 책. ‘맞아, 맞아!’ 하면서 술술 책장을 넘기다가도 가금은 뜨끔해 하며 무릎을 치게 된다. 특히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열린책들 편집부,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2017) 


2008년 첫 출간 이후 해마다 개정판이 나오고 있는 책. 편집자에게 가장 유용하겠지만 번역가도 곁에 두고 수시로 참고하면 좋다. 나도 번역 초창기에는 끼고 살다시피 했다. 지금은 참고할 일이 많지 않아 2014년 판을 마지막으로 더는 구입하지 않고 있지만, 번역을 갓 시작한 사람이라면 최신판으로 구비하길 바란다.

*김경원·김철호,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 (2006) 


“우리말답게 쓰려면 이렇게 써야 한다”라고 강요하지 않고 왜 그런지 자상하게 알려주는 책. 번역을 하다보면 뭐가 맞고 뭐가 틀린가에만 관심을 쏟기 쉬운데, 나는 번역가야말로 누구보다 훌륭한 언어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번역가는 굳어진 언어를 그저 사용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말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조셉 윌리엄스, 『문체』 (2010)


영한 번역을 하려면 우리말 글쓰기 못지않게 영어 글쓰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영어로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자가 어떤 의도와 전략을 구사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그래야 번역자도 한국어에 맞는 나름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스티븐 핑커, 『언어본능』 (2008)


『문체』를 읽으면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알 수 있는데, 『언어본능』은 이 논의를 한층 깊이 끌고 간다. 뇌의 처리 용량(단기기억)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파롤이 랑그와 구별되는 결정적 특징이다. 특히 7장 ‘말하는 머리들’에서 번역에 활용할 만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을 수 있다.

*노마 히데키, 『한글의 탄생』 (2011)


어차피 똑같이 발음할 거면서 받침을 ‘ㄷ, ㅅ, ㅈ, ㅊ, ㅎ’으로 구분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한글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문자다.

*이남덕, 『한국어 어원 연구』 (1987)


어휘를 적확하게 구사하려고 하다보면 어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 이 책은 동아시아의 여러 언어를 비교하여 단어의 원래 형태를 밝히는데,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곁에 두면 든든하다.


이 밖에도 좋은 책이 많다. 책꽂이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만 골라보았다. 번역 실력은 공부가 반, 실전이 반이다. 번역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실제 문장을 대하면 앞이 캄캄해지기도 하고, 번역 경력이 아무리 길더라도 뜻이 안 통하는 글을 기계적으로 양산했을 수 있다.


그러니 꾸준히 공부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번역은 하면 할수록 눈이 높아진다. 아무리 오래 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자기 번역에 만족하지 못한다. 번역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공부가 숙명이다. 사서 고생하는 길이다. 그나마 번역 공부를 돕는 책들이 하나같이 재미있어서 다행이랄까.


필자 소개



노승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한 후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2006년에 출판 번역에 입문해 11년째 번역을 하고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번역가이자 실력만큼 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생계형 번역가. 지금까지 50권가량을 번역했다. 편집자가 뽑은 《시사인》 2014년 올해의 번역가로 선정됐다.


주요 역서로는 멜러니 선스트럼의 『통증 연대기』, 노엄 촘스키의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 아룬다티 로이의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이단의 경제학』,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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