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우리가 놀라움의 원천입니다

조회수 2018. 5. 7. 12:04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카를로 로벨리의 <모든 순간의 물리학> 중에서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오늘의 큐레이션]으로 소개해드리는 책은 카를로 로벨리<모든 순간의 물리학>입니다.


원제는 이탈리아어로 Sette bervi lezioni di fisica(7개의 짧은 물리학 수업)으로 2014년 출간됐습니다. 총 일곱 개로 구성된 강의 형식의 책입니다.


번역서의 부제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물리학의 대답'인 것처럼, 현대 물리학의 핵심 이론과 최신의 흐름까지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소개하는 한편 궁극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끕니다.


이 중에서 마지막 장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합니다.


저자 카를로 로벨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인문학적인 글쓰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최근에는 앞의 책을 좀 더 확장시킨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도 번역돼 나왔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조금씩 성장하면서 우리의 존재와 우주의 극히 일부에 대한 사실들이 점점 더 많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수세기를 지나오면서 이미 많은 것을 배웠지만, 특히 지난 20세기에는 더 많은 발견이 있었습니다. 한때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인 지구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 계통과는 별개의 종류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도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모든 생명체와 똑같은 조상으로부터 계승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비와 낙엽송 같은 동식물과 조상이 같습니다. 현재 우리 모습은 어릴 때 세상이 자신만을 위해 돌아간다고 생각했다가 성장해서야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외동아이와 같습니다. 귀하게 자란 외동아이일지라도 결국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과 사물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비춰보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에 관한 의문 중에서 종종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이 나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행동이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뿐이라면, 우리가 자유롭게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우리의 자율성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통제하는 자연법칙의 엄격성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걸까요? 혹시 우리의 내면에 자연의 규칙성을 왜곡하여 밀어내고, 그 자리를 자유로운 생각으로 대체하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자연의 규칙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자연의 규칙성을 위반하는 무엇인가 있다면, 이미 오래전에 알아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물의 자연스러운 행동 양식을 침범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리학에서 화학, 생물학에서 신경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대 과학 분야에서는 아직 집중적으로 관찰만 하고 있습니다. (중략)

혼란에 대한 해결책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할 때 정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행동들이 우리 스스로의 내면과 뇌가 제한하는 명령을 통해 이루어지고 외부의 그 무엇인가에 의해 강요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롭다고 해서 우리 행동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 제한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우리 뇌 안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유로운 결정은 우리 뇌에 있는 수십억 개의 신경세포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결과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즉, 신경세포들의 상호작용이 우리의 판단을 정의할 때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결정을 할 때 결정을 하는 주체가 '내'가 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만약 '내'가 내 신경세포들의 총체가 결정하는 것과 다른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한다면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는 '나'와 '나의 뇌 속의 신경세포'는 별개가 아니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개인은 수많은 것이 복합되어 있지만 매우 엄격하게 통합된 하나의 프로세스와 같기 때문입니다.


흔히 인간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을 미리 예측하기에는, 특히 우리 스스로 예측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스피노자가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이미지가 우리 내면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극단적으로 더 거칠어지고 퇴색했을 때 내면적인 자유를 강하게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놀라움의 원천입니다. 우리의 뇌 속에는 은하계 하나를 채울 만큼의 숫자인 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신경세포들이 이룰 수 있는 관계나 조합을 생각하면 훨씬 더 천문학적인 수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얼마 되지 않는 세포들이 아닌, 모든 세포의 총체로 만들어진 하나의 프로세스라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나'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비춰보고 스스로를 대변하며, 스스로 변화무쌍한 관점에 따라 정보를 관리하고 표현 방식을 구축하는, 즉 뇌의 구조를 구축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인식함으로써 형성되는 (아직 모든 것이 확실히 분명하지는 않지만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방식으로 형성되는) '나' 자신입니다.


결정을 하는 것이 '바로 나'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가장 바람직합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가 주장한 것처럼 나는 곧 내 몸이며, 나의 뇌와 마음 속에서는 나 자신도 헤아릴 수 없는 끝없는 복합성을 바탕으로 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중략)

이 책에서 내가 이야기한 세상의 과학적 이미지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윤리적, 심리적 차원에서의 사고나 감정, 느낌과도 상반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우리는 세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프로세스에 적합한 다양한 언어를 이용해 세상을 가둡니다.


각각의 프로세스마다 서로 다른 수준의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곤 하지요. 다양한 언어들이 서로 교차되고 얽히고 서로를 풍요롭게 하며, 프로세스 자체도 마찬가지로 그러합니다. 우리의 심리학 연구는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 작용을 이해하면서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이론 물리학 연구는 우리 삶을 이끄는 정열과 의욕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윤리적 가치와 열정, 사랑이 자연의 일부이거나 동물의 세계와 공유되고 있기 때문에, 혹은 수백만 년간의 인류의 진화에서 제한이 있다고 해서 진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실질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진실합니다. 윤리와 열정, 사랑은 복합적인 현실이고,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눈물과 웃음, 감사와 이타주의, 믿음과 배신, 우리를 번뇌하게 하는 과정과 평온함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함께 구축한 공통의 지식이 교차하는 풍요로운 연결망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자연 그 자체의 일부입니다. 자연에서 우리는 통합된 부분이자,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자연의 표현 방식 중 한 가지로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이러한 점이 우리에게 세상의 일들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중략)


우리는 호기심이 많은 종입니다. 원래 호기심이 많은 종('호모'류)은 최소 열두 종류 정도였는데 이 무리에서 현재까지 남은 종은 우리 인류뿐입니다. 우리와 같은 종에 속했던 다른 무리들은 이미 멸종했는데, 그중 네안데르탈인의 경우 그나마 최근까지 존재했다가 약 3만 년 전에 사라졌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이 종의 어떤 무리는 권위적이고 호전적인 침팬지와, 또 다른 어떤 무리는 평온한 성격에 다른 동물과 잘 어울리고 평등한 것을 좋아하는 작은 침팬지 보노보와 비슷했습니다.


이 종의 또 다른 한 무리 역시 아프리카에서 서식하다가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러 나와 머나먼 파타고니아(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끝)를 비롯해 달에까지 발을 디뎠습니다. 우리의 호기심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을 향한 것이지요.


십만 년 전, 우리 종은 바로 이런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아프리카를 떠나 점점 더 먼 곳을 구경하며 학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프리카의 밤하늘을 비행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먼 조상 중 누군가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탁 트인 북쪽을 향해 걷다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상상했을지 모릅니다. 먼 후손 중 누군가가 자신과 똑같은 호기심에 이끌려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연을 살필 수도 있으리라고 말이지요.

내 생각에 우리 종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거북이처럼 자신과 유사한 종을 수천, 수백만 년 동안, 인류 역사의 수백 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존재하게 할 만한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수명이 짧은 종에 속합니다. 우리의 사촌뻘 되는 종은 이미 모두 멸종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기까지 하고 있지요. 우리가 변화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결과 기후와 환경은 처첨한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구에게는 별일 아닌 작은 에피소드일 수 있지만, 우리 인간은 아무 피해 없이 지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언론과 정치계는 우리 곁을 도사리고 있는 위험 요소들을 무시하고 묻어버리려 합니다.


아마 지구상에서 개인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종은 우리 인간뿐일 것입니다. 나는 조만간 우리가 만든 문명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역시 진정으로 멸종에 이르는 모습을 의식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종이 될까 봐 두렵습니다.



[북클럽 오리진] 컨텐츠 카톡으로 받아보기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