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할 수 없는 모래알 댓글, 그리고 모래알이 모여 만든 '댓글문화'

조회수 2017. 12. 29. 08: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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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서 소통하는 댓글문화

성경은 총 6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고 두껍다. 이 두껍고 말 많은 책은 하나의 메시지로 이해하라고 하나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너무 길어서 이해를 잘 못 하는 사람도 많다. 토막토막 잘라서 토막토막 이해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 한다.

▲ 코끼리는 너무 커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부위에 따라 코끼리의 모습이 달라진다.

인터넷과 함께 등장한 ‘댓글’ 

위키백과에 따르면, ‘댓글’이란 대한민국 인터넷 시대 초기, 유즈넷(USENET) 영문으로 되어 있는 인터넷 용어를 한글화시키자는 과정에서 생긴 신종 단어다. 유즈넷(USENET) 뉴스그룹 초창기 시절 'reply'를 '리플라이', '답장' 등으로 주로 사용했는데 '리플라이'는 영어의 한글식 표기인 데다가 글자수가 길어서 오래가지 못 했다고 한다.


'덧글'의 경우는 '덧붙여 쓰는 글', '댓글'의 경우는 '대롱 대롱 이어지는 덧대어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초창기에는 두 단어가 혼용되었다. 그러던 중 ‘덧글'의 경우 글을 게시한 작성자가 추가로 덧붙여 쓰는 글의 의미가 강해졌고, 일반적인 ‘reply’는 '댓글'로 통용되었다. 이후 '댓글'은 '본문에 대어서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정식 백과사전에 등록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백과사전에 등록된 ‘댓글’에 대해 한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댓글'은 '대답하다, 응수하다'를 뜻하는 영어 단어 '리플라이(reply)'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형태상 한자어 접두사 '대(對)'와 사이시옷(ㅅ)+'글'로 분해된다.

뜻대로 해석하면 '대답하는 글, 상대하는 글' 또는 줄여서 '답글' 정도로 풀이된다.

'리플라이'를 줄여서 '리플'로 부르기도 한다.

 (출처 : 두산백과)

위 정보를 토대로 살펴보면, 댓글은 일단 인터넷과 함께 등장했다. 그리고 인터넷은 빠르게 발전하여 오늘날 온라인 시대를 만들었다. 블로그, 카페 등의 온라인 게시판과 수많은 온라인 미디어, SNS (사회관계망서비스, Social Networking Service) 등이 촘촘하게 발생하여 방대하고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를 생산했다. 그리고 그 모든 콘텐츠 밑에 ‘본문에 대어서’ ‘대롱 대롱 이어진’ 댓글이 등장한 것이다. 댓글은 온라인 콘텐츠 본문의 주제와 연관된 또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다. 심지어 본문보다 댓글이 더욱 부각되는 모습도 나타난다. 이윽고 우리는 ‘댓글문화’가 존재하는 새로운 시대에 살게 되었다.


댓글은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수단이다. 하지만 비대면 온라인 소통이라는 특징 때문에 자유롭게 인격을 말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댓글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모습을 살펴보고 모래알과도 같은 댓글이 왜 중요한지 짚어보자.


댓글로 시작된 온라인 민주주의의 희망 

이것저것 다 차치하고 일단 민주주의를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댓글만한 개국공신이 또 없다. 신분과 성별, 지역과 세대, 학력과 재력, 신체적 차이를 모두 뛰어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접속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댓글을 쓸 수 있다. 유럽 민주주의의 뿌리로 숭상 받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 공화정 시대의 로마조차도 이런 파격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진 않았다. 미 군부의 군사적 야심에서 비롯된 인터넷 네트워크가 민주주의의 희망을 꽃피울 단초가 되었다니 새삼 아이러니하다.


댓글에는 주로 개인의 의견이 피력된다. 그래서 온라인 뉴스 밑에는 기사 내용에 대해 무궁무진한 개인의 의견이 나타난다. 그 무궁무진한 의견에 대해 다시 다른 개인의 의견이 답글과 덧글의 형태로 주렁주렁 달린다. 민주주의에서 ‘여론’은 가장 절대적인 근거가 되는데, 이렇게 켜켜이 쌓인 수많은 개인의 의견들은 온라인 시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종의 여론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주요 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이 관련 댓글을 언급하며 ‘국민의 목소리’로 여기게 된 것이다. 물론 온라인이라는 한계 때문에 절대적 여론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전 세대보다 온라인의 개인은 보다 적극적으로 ‘여론’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주요 요소로서 ‘탈권위’가 있다. 최근 댓글은 콘텐츠 내용뿐 아니라 기자나 작성자에 대한 비판까지 서슴지 않는다. 국민 대부분이 아주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어서, 논리와 대안도 없이 장문의 글을 쓰는 기자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논리적이고 일목요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 역시 발전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1897년 10월29일 ~ 1945년 5월1일) :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믿게 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댓글이 댓글을 집결시킨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스스로 모여 하나의 현상을 만드는 것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다. 최근 논란이 된 뉴스 중 하나를 예로 들면, 처음엔 뉴스로 보도되지 않고 사건 당사자들의 온라인 게시물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이 콘텐츠에 대한 관심, 즉 댓글의 양이 폭증하면서 온오프라인을 넘나들어 개인과 개인 사이로 전파되었고, 해당 사건이 역으로 주요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한 개인의 온라인 게시물과 그에 대한 반응, 즉 댓글이 언론의 뉴스로 조명된 대표적인 사례다. ‘논란’이 되었단 표현도 결국 ‘댓글이 많았다’는 뜻이다.


사실 예전에는 기득권 언론이 ‘복합적’ 이유로 제대로 보도하지 못 한 사건들이 참 많았다. 일부 비주류 언론이나 단체가 구석에서 숨죽여 속삭일 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온라인에선 어떤 뉴스라도 단 하나의 하이퍼링크로 평등해졌고,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 할지라도 수많은 개인들이 댓글로 달라붙으면 거대한 사회적 이슈로 폭발하기도 한다. 이 때 주류 언론은 ‘여론’ 즉 폭풍같은 댓글을 보며 뒤늦게 이슈에 뛰어든다. 이처럼 개인들은 댓글을 통해 스스로 뉴스와 이슈를 만들고 있다.


개인과 개인의 자유로운 소통 

댓글을 구매후기나 방문후기, 상품평과 리뷰 등으로 확대해보자. 온라인 시대 이전에 소비자들은 일방적으로 기업이나 제조사의 광고에 의존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음식점에 가기 위해선 일종의 모험심이 필요했다. 온라인 쇼핑으로 제품을 구매하려면 온갖 감각을 총동원해서 과감한 결심을 해야 했다. 친구나 주변 지인에게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 한 사람은 그러지 못 했다.


하지만 온라인 댓글은 누구에게나 선험자의 경험을 제공한다. 온라인 쇼핑몰의 구매후기는 제조사의 현란한 사진과 프레젠테이션보다 실제 효용가치가 높다. 연인과의 저녁식사는 ‘맛집 블로거’가 제공하는 콘텐츠 덕분에 더욱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보다 먼저 경험한 사람, 즉 나와 똑같은 소비자로서 개인의 솔직한 경험담을 미리 알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됨으로써 나는 이전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자유로운 의사소통이야말로 민주주의에서 빠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이 같은 개인간의 소통으로 정보는 더욱 평등해졌다. 개인이 온라인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대가 되면서 평등의 세레모니는 시작되었고, 댓글이라는 또 하나의 콘텐츠는 급기야 ‘댓글문화’를 만들게 되었다. 개인 콘텐츠와 댓글이 결합하면서 제공자와 관찰자 모두에게 더욱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또한, 개인과 개인은 콘텐츠를 생산하고 댓글을 달면서 서로 친목과 교류를 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만들어낸다. SNS의 게시물을 두고 댓글로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온라인 시대의 진풍경이다. 오프라인에서의 관계 여부와 상관없이 관심을 끌 수 있는 콘텐츠라면 그 누구나 댓글로 자신의 관심을 표명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뛰어넘어 일면식도 없이 오직 개인과 개인의 자격으로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바로 댓글이다.


소통의 장에서 개인과 개인은 자유로운 토론을 펼치기도 한다. 본문에서 얻을 수 없던 정보까지 제공하는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들 덕분에 댓글이 콘텐츠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우리 현대사는 그토록 민주주의를 갈구해왔는데, 이러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야말로 민주주의에서 빠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개인적 카타르시스의 창구 

드라마 후기 또는 증권, 자동차 토론 게시판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례다. 일단 ‘아는 사람’만 찾아 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마음껏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곳처럼 나를 귀찮게 하는 반박 댓글도 별로 없다. 다른 사람들도 내 댓글에 대해 별로 관심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마음껏 하고 싶기 때문이다. 주로 드라마 후기에는 연예인과 작가에 대한 호불호도 나타나지만 극중 등장인물에 감정이 이입되기도 하는 등 각자 ‘알아서’ 자기 생각을 마음껏 드러낸다. 갑론을박이 오고 가는 일은 딱히 없다. 드라마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보고 있는 시청자만 게시판에 들어오기 때문에 분위기 자체가 상당히 화기애애하다.

▲ 누구에게나 대나무 숲은 필요하다.

이와 반대로 증권 토론방은 분위기가 사뭇 험악하다. 마치 수많은 개인이 한 방안에서 각자 자기 칼로 벽을 긁거나 심지어 스스로 자해하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칼로 찌르진 않는다. 자동차 토론 게시판도 이와 비슷하다. 특정 브랜드에 대한 갑론을박이 늘 있지만, 목숨 걸고 칼부림을 하진 않는다. 이러한 온라인 게시판은 댓글 작성자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관찰자 입장에서도 훌륭한 카타르시스의 장이다.


즉, 개인적 스트레스 등을 마음껏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이것을 ‘재미’라는 관점에서 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보면 결국 개인의 자유와 잇닿아 있다. 정치 뉴스 토론방도 카타르시스의 창구가 되긴 하지만, 반박 댓글로 인한 스트레스가 그 수치를 상회한다. 물론, 정치나 사회 이슈에 대한 해학적 비판은 가장 중요한 개인의 자유다.


자유로워서 시작된 댓글의 문제들 

결국 댓글의 본능은 자유다. 그래서 댓글은 새로운 온라인 시대를 만들어왔지만 자유라는 본능 혹은 외부적 요인 때문에 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개인 콘텐츠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이젠 누구나 악성 댓글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무심코 다른 개인의 콘텐츠를 힐난하는 댓글을 아무렇게 쓰고 있다. 그렇게 유용하던 맛집 블로그와 구매후기, 상품평은 기업 자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바람에 순수한 빛을 잃고 있다. 

▲ 이젠 누구나 쉽게 악성 댓글과 마주하게 된다

댓글 문화가 생성되고 온라인 생태계가 발전하면서 조작은 아닌데 조작이 되는 경우가 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상품을 구매하면 몇 일 뒤에 마일리지 혜택을 줄 테니 상품평을 써달라는 문자가 날아든다. 어떤 음식점에 갔더니 음식 사진을 SNS에 올려주면 음식값을 할인해주겠다고 한다. 이 때 일부러 구매상품을 힐난하거나 괴기스러운 음식 사진을 올리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 즉, 구매후기나 맛집 탐방 후기 등은 지극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작성되어야 하는데, 왜곡될 요소가 하나 둘 조금씩 가미되기 시작한 것이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후기나 상품평 등이 위력적이 된 이유는, 그것이 순수한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조족지혈의 적혈구 수준이라 할지라도 그 어떠한 인위적 유도가 조금이라도 개입되면 온라인 생태계를 교란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못 한 모습이다. 구매후기를 아무도 믿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온라인 정보 자체에 대한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불통의 장이 되어 버린 댓글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댓글은 소통의 장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비난과 고집으로 점철된 불통의 장이 되어 버렸다. 단순하게 살펴보면 일단 작성자의 상황 때문이다. 댓글을 쓰려고 집에서 목욕재계를 한 후, 정좌하여 PC 앞에 앉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대부분의 댓글은 집중하지 않고 번잡한 환경 속에서 쓰여진다. 최근엔 온라인 콘텐츠 자체가 모바일로 쉽게 접속하여 짧은 시간에 빠르게 탐색하는 수준으로 변화하고 있다. 댓글은 이러한 과정에서 쓰게 된다. 즉, 미리 준비하지 않고 댓글을 쓸 기회를 얻는 동시에, 콘텐츠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 한 상태에서 댓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 모든 댓글은 자기 말이 가장 논리적이고 타당하기 때문에 상대편 말꼬리만 계속 부여 잡는다.

▲ 사실, 다수결의 원칙 하나면 불통이든 소통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짤막하게 써야 하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댓글은 여전히 콘텐츠 하위 공간에서 텍스트 편집기 수준의 환경에 직면해있다. 자신의 SNS에는 지대한 관심과 심혈을 기울여 자신만의 독보적인 콘텐츠를 탄생시키고 그 콘텐츠에 달린 댓글을 정성껏 보살펴주지만, 자기가 온라인 공간 어딘가에 던지고 나온 댓글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못 한다. 혹은, 기억 한다 해도 내가 조목조목 반박하고 멋지게 ‘한 방 먹인’ 그 댓글에 대해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굳이 찾아가서 보지 않는다. 그래서 댓글은 좀처럼 논리적으로 쓰여지기 어렵다.


일부 국내외 온라인 언론은 온라인 기사에 댓글을 쓸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순수한 여론이 형성되지도 못 하고, 이성적이지 못 한 비난과 비방이 횡행한 결과다.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소통의 장으로 각광 받았던 댓글은 차라리 없는 게 속편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익명성과 물리적 거리에 따른 댓글의 본능

‘댓글 실명제’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부모가 지어주신 자기 이름 석자를 걸면 제 아무리 온라인 공간에서라도 험한 소리 못 할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즈음 SNS의 댓글을 살펴보면 익명성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온라인 뉴스에 쓰는 댓글과 달리 SNS 콘텐츠에 작성하는 댓글은, 작성자의 하이퍼링크를 타고 개인적 신상을 모조리 들여다 볼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한다. 즉, SNS에서 댓글을 쓰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실제로 ‘누군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댓글들이 목격된다.

▲ 익명성에 더해, 물리적인 거리가 댓글의 질을 악화시킨다

따라서 익명성에 더해, 물리적인 거리가 댓글의 질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상대방과 나, 개인과 개인이 멀리 떨어져 있다. 당장 물리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오프라인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게 된다. 온라인은 정확히 이와 반대다. 나이와 성별, 학력과 재력, 신체적 차이 등 모든 것을 뛰어 넘어 소통하다 보니, 겁도 없이 참 잘도 말하는 경우가 나타나는 것이다.



댓글, 그 빛을 지켜야 하는 이유

 

댓글은 자유롭기 때문에 빛이 나지만, 그 빛 때문에 그림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빛이 더 중요하다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방안이 다 어두워지는 한이 있어도 그림자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 댓글에 대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댓글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방치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댓글이 조작되고 왜곡될 여지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선 두번째 문제는 실제로 해결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옵션 열기’와 같은 현상을 온라인에서 개인들이 포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조작된 댓글의 흔적은 결국 수많은 개인들의 본질적 다양성 때문에 결국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공권력의 법적 수사가 ‘정의롭게’ 이뤄진다면 얼마든지 포착할 수 있는 문제다.


첫번째 문제 역시 장기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악성’ 댓글을 자정할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자유를 있는 힘껏 방치하면 방종이라고 한다. 참 멋진 말이다. 온라인 댓글은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지기 어렵기 때문에 일정부분 규제와 제한을 두어야 할 수도 있지만, 결국 그 경계선을 조금씩 이동하다 보면 개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선을 넘나들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우리 스스로 헌납하는 길에 서둘러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3.1운동 이후 우리가 자유를 위해 싸우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아직 온라인 시대가 무르익은지 얼마 되지 않았고, ‘댓글문화’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 이 상태에서 풍선의 어느 한 쪽을 꽉 쥐어 버리면 터질지도 모른다.

욕설을 못 쓰게 막는다고 해서 악성 댓글을 쓰지 못 하는 건 아니다. ‘ㅅㅂ’는 온라인상에서 ‘신발’로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다. 욕설과 비판적 표현 입력을 원천적으로 제한한다 해도 그와 유사하게 인식될 만한 신조어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구조적 제약은 어차피 풍선효과처럼 다른 한쪽을 부풀어오르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사실 댓글의 자유는 이미 최소한으로 제약 받고 있다.


일부 사이트에서 운영하는 댓글 신고제도는, ‘도 넘은’ 표현에 대한 다른 개인의 신고를 통해 관리자가 해당 댓글 작성자에게 삭제 지시를 하거나 직접 삭제하는 시스템이다. 실제로 이렇게 삭제된 댓글들의 흔적이 게시판 곳곳에서 발견된다. (덧글만 덩그러니 남기 때문에) 이쯤되면 신고 또는 피신고 경험자나 삭제 댓글의 흔적을 발견한 목격자 모두 공포에 휩싸여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알아서’ 유지하게 된다. 그 유명한 ‘건전한’ 댓글 문화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원천적 봉쇄보다는 사후 모니터링과 관리, 그에 따른 책임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 TV시청을 하면서 실시간으로 댓글로 소통을 할수 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례는, 최근 온라인 게임에서 자신을 비난한 사람을 실제로 찾아가 ‘응징’한 경우다. 한 SNS 게시판에 게시되어 많은 개인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물리적 거리를 완전히 소거시킨 예로서, 모든 온라인 악성 댓글에 이런 식으로 대처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으나, 무책임한 온라인상의 행동이 이젠 무조건 용납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시민사회의 신호 정도로 기대해보고자 한다. 동시에 이것이 조작된 콘텐츠가 아니길 소망한다.


결국 댓글의 자유는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조작의 흔적을 개인들이 찾아내고, 개선된 제도와 시스템은 개인 스스로 자유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하나씩 실제로 실천되어 새로운 댓글문화를 만들고 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만들어낸 콘텐츠는 여전히 서로에게 유용하다. 온라인 시대 초기와 지금의 모습은 여러 측면에서 달라졌고 앞으로 또 달라질 것이다. 비록 그림자가 지었을지라도 빛은 지켜주어야 한다.




댓글, 무시할 수 없는 모래알

▲ 댓글문화는 앞으로 더 긍정적이고 생산적으로 변화할것이다.

모래알 하나는 굉장히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모래알이 모여 모래주머니를 만들고 모래주머니가 모여 큰 홍수를 막는다. 큰 바위로는 넘치는 물을 완전히 틀어막을 수 없다. 작은 모래를 모아서 만든 모래주머니가 있어야 비로소 제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큰 바위에서부터 작은 모래알이 되려면 수없이 깎이고 부딪치고 밟혀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래알을 한 줌 쥐어서 자세히 보면 은근히 다 다르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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